[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님, 호칭파괴 어렵지 않지요?

입력 2019-04-30 04:03

직급 대신해 무조건 ‘이름+님’ 삼성 등 대기업으로 급속 확산
젊은 세대 선호에 호응 분위기… 인격 존중으로 소통에 큰 도움


화장품 기업 아모레퍼시픽에서 인턴 중이던 막내딸아이가 전하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 회사에선 전 임직원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른다는 것이다. 부장이니 대리니 하는 호칭이 아예 없다고 했다. 정말인가 싶어 확인해봤더니 ‘태평양’ 시절이던 2002년부터 시행 중이란다. 무려 17년 전에 시작했다니 나만 몰랐던 건가.

신기하게 받아들였기에 퇴근한 딸아이한테 ‘님’ 호칭과 관련한 사내 분위기를 매일 꼬치꼬치 물어봤다.

-50대 부장급이 30대 대리급이나 평사원한테 자연스럽게 ‘님’이라 부르더냐.

“아주 자연스러워요. 저한테도 꼬박꼬박 ‘님’이라 하는데요.”

-그렇게 불리면 네가 민망하지 않냐.

“모두가 서로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그렇게 불리니까 기분이 좋냐.

“처음 보는 사이인데 이름 부르며 반말하는 것보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요. 뭔가 대접받는 기분이고요.”

-네가 부장급, 차장급 아저씨한테 이름 부르기가 조심스럽지 않냐.

“처음에 좀 주저했지만 금방 괜찮아졌어요. 저는 목소리를 조금 작게 해서 부르긴 해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에 도움 되겠다는 기대감에 곧장 우리 조직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경영전략실 소속 팀장들의 첫 반응이 다소 미지근했지만 한 팀만 시범적으로 시행해봤다. 1주일 후 평가회의에서 이런 말들이 오갔다.

A부장: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점에서 뜻있는 시도라 생각한다. 밑으로는 호칭이 자연스러운데 위로는 이름 부르기가 어렵다. 아랫사람을 ‘님’이라 불러가지고는 훈계나 꾸지람이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B차장: 호칭은 ‘님’이라 하면서도 곧바로 반말이 이어진다. 위로는 쉽지 않다.

C과장: 후배한테 ‘님’ 하니까 거리감이 느껴진다. 나는 아무래도 반말이 좋다.

D대리: 아주 만족한다. 윗분들에게 이름을 부르지만 ‘님’을 붙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한다. 정착되면 최소한 아랫사람에게 막말은 안 하게 될 것 같다. 회식자리 같은 데서도 이를 지키면 좋겠다.

E사원: 예전처럼 부장님, 과장님이라 부르는 게 더 편하다. 그러나 계속 노력하면 될 것 같긴 하다.

예상대로 의견이 분분했다. 당장 결론 낼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돼 1주일 더 적용해보기로 했다. 1주일 후 평가회의에서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토론 끝에 이왕 하는 것 경영전략실 전체로 확대해보기로 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다시 2주일이 지나 팀장들의 의견을 들어 일단 이런 결정을 하게 됐다.

“상급자가 하급자한테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고, 하급자가 그걸 좋게 받아들이므로 가급적 그렇게 부르도록 한다. 반대로 상급자에게 이름을 넣어 부르는데 부담을 느끼는 하급자가 있다면 예전처럼 직급 호칭을 해도 상관없다.”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나의 과문일 뿐 대기업의 직급호칭 파괴는 꽤 오래됐다. 선두주자는 CJ그룹. 과거 신문기사를 검색해봤더니 2000년부터 시행 중이며, 그룹 공식 회의석상에서 이재현 회장한테 ‘회장님’ 대신 ‘이재현님’이라 부른다고 한다. IMF 경제위기를 겪었음에도 임직원들이 상명하복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 최고경영진이 당시로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 셈이다. CJ그룹은 호칭 파괴 덕분에 임직원들 간 의사소통이 원활해져 창의적 조직 환경이 조성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도 만족스럽게 평가하고 있단다. SK텔레콤이 2006년 ‘매니저’ 호칭을 도입한 데 이어 2010년대 들어서는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ICT 기업들이 직급호칭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주목되는 건 최대 기업 삼성그룹이 이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2년 전 이미 직급체계를 단순화하고 보직자를 제외하고는 전원 서로 ‘님’ 호칭을 하도록 했다. 금융 계열사 큰형격인 삼성생명도 이달부터 임원, 파트장, 지점장 등 보직자는 기존 호칭을 유지하되 주임, 선임, 책임, 수석 등 4개 직급은 ‘프로’로 통일해서 부르게 했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호칭 파괴에 나서는 데는 단순히 창의적 소통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하다. 몇몇 대기업 간부들을 취재해본 결과 우수 인력 확보에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 같다. 연공서열에 따른 수직관계를 깸으로써 개인 능력을 우선시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능력중심 평가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유능한 직원을 붙잡아두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는 얘기다.

신문사는 독특한 호칭 문화를 갖고 있다. 논설위원이나 편집국 기자들은 상하 간 호칭이 아주 편하다. 수습기자 훈련 시기에는 엄격하지만 부서에 배치되고 나면 모든 상급자는 대략 ‘님’ 없는 ‘선배’로 통일된다. 기자 초년병도 부장 정도까지는 그냥 ‘선배’라 불러도 무방하다. 반대로 간부나 선배가 후배를 부를 때는 이름에다 반말이 일상적이다. 친한 사이에선 ‘야’ ‘어이’가 예사다. 인격적 존중과는 거리가 멀지만 서로 편하게 부르니 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지 않나 싶다.

하지만 기자직이 아닌 미디어경영직은 일반 기업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급자에 대한 직급호칭이 깍듯한 반면 하급자에 대해서는 대충 반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호칭 파괴 실험을 한 지 2개월쯤 됐다. 이제 하급자에 대한 ‘님’ 호칭은 제법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절반의 성공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이 정도라도 정착됐으면 좋겠다. 매사 익숙한 게 좋다고, 혹여 원점으로 되돌아가진 말아야 할 텐데…. “○○○님, 호칭 파괴 별로 어렵지 않지요?”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