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한말 의병들의 처절한 기록이 새롭게 확인됐다. ‘음독’ ‘전사’ ‘참수’ 등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의병들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국민일보가 29일 입수한 국가보훈처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호남사학회 연구팀은 호남 의병과 관련된 자료를 전수조사해 의병 명단을 파악한 뒤 국가기록원 등에 있는 일본 문헌자료와 비교하며 내용을 검증했다. 이 과정에서 동의기념비, 호남삼강록, 호남절의사 등 그동안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던 사료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처음으로 이뤄졌다.
전남 영광 출신의 의병 임영규(林英圭)는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음독해 순절했다는 기록이 호남삼강록에 남아 있다. 호남지방의 충절과 효행에 관한 기록을 모은 책인 호남삼강록에는 한말 의병 70여명이 수록돼 있다. 연구팀 관계자는 “음독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나오는데 아편을 다량 섭취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당시 아편은 일종의 진통제로 민간에 널리 쓰였다고 한다.
전북 고창 출신의 유생 박규화(朴奎和)는 경술국치 때 단식으로 순절했고, 전남 나주 출신 김상민(金相 )은 1908년 능주(지금의 화순)에서 전투 중 순국했다는 기록이 새로 발견됐다. 전북 진안에서 활동한 의병 전진명(全辰明)은 일제에 체포돼 참수를 당했다. 전북 임실 출신 설도홍(薛道洪)은 1940년대 전후로 창씨개명을 거부하다 자결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가족이 함께 의병 활동에 뛰어든 사례도 많았다. 전남 영광 출신 김현중(金賢中)은 아들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가 낭월산에서 부자가 함께 전사한 것으로 기록됐다. 1907년 탑정 전투에서 함께 숨진 의병 선동규(宣東奎)와 선승규(宣昇奎)는 8촌 형제였다. 전남 화순 출신 이계휴는 1911년 무렵부터 족숙(아저씨뻘) 이승정과 함께 비밀 항일운동을 벌이다 여러 차례 체포됐고, 결국 1915년 고문으로 사망했다.
이색적인 의병 활동도 눈에 띈다. 전남 나주에서 활약한 박용식(朴鏞植)은 수천 개의 목활자와 인쇄판을 갖고 다니며 각종 격문과 통문을 인쇄해 사방에 배포했다. 그는 인쇄물을 통해 “의병 활동은 위기에 빠진 국가와 죽어가는 백성을 구하기 위한 보국안민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전’이었다.
전남 무안 출신 김현진(金賢鎭)은 미국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갔다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접한 뒤 조국으로 돌아와 의병 활동에 가담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김현진은 “이제 본국의 진보와 발전의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하면 이곳(미국)에서는 불가능하므로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 죽음으로써 실행을 기하고자 한다”는 말을 남기고 귀국했다. 경북 청도에서 의병 활동을 벌이던 그는 1908년 체포됐다.
이번에 동의기념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진 것도 의미 있는 성과다. 전북 정읍에 있는 동의기념비는 1929년 세워졌다. 비석에는 1906년 봉기한 정읍 태인 지역 의병 약 120명과 1912년 결성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한 135명의 직책과 이름이 기록돼 있다.
비석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전체 명단을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호남삼강록과 호남절의사 등 지방 사료에서도 의병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 대거 발견됐다.
호남 의병에 관한 자료를 전수조사한 것도 처음이다. 연구팀은 각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 자료를 전면 재검토하면서 현장답사를 통해 추가 자료를 확보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1909년 일본 군경의 교전 횟수 중 47.2%가 전라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교전 의병 수를 기준으로 하면 전라도가 60%에 달한다. 그만큼 호남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했다는 뜻이다.
순천=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