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비영리 금융기관인 금융결제원이 운영하는 주택청약 시스템을 공공기관인 한국감정원으로 옮기는 작업이 멈춰섰다. 파열음은 청약 관련 개인·금융 정보를 두고 불거졌다. 금융결제원은 개인·금융 정보 공유를 거부하고 있다. 금융실명법(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위반 가능성이 있어서다. 반면 감정원은 금융결제원이 업무를 뺏기는 데 불만을 갖고 ‘몽니’를 부린다고 맞선다. 두 기관의 충돌을 중재해야 할 금융위원회와 국토교통부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에 따라 10월 새로운 청약 시스템 가동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28일 정부에 따르면 국토부는 지난해 내놓은 9·13 부동산 대책의 후속 조치로 청약 시스템 운영자를 10월 1일부터 금융결제원에서 감정원으로 바꾸기로 했다. 사전 검증을 강화한 새로운 청약 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서다. 현재 시스템에서는 청약자가 무주택 기간, 부양가족 수, 현 주소지로 전입한 날짜 등 가점 내용을 입력한다. 부양가족 수 등을 잘못 입력해 의도치 않은 부적격 당첨자로 적발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감정원은 청약자 본인 및 가구 구성원의 주택 소유 여부, 소유 주택의 공시가격 열람, 무주택 기간 산정 등 관련 정보를 한 번에 조회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할 방침이다.
별 문제 없을 듯하던 청약 시스템 이관은 청약정보 공유에 발목을 잡혔다. 청약 시스템을 운영하려면 주택청약 계좌, 모집공고 내역, 청약접수 정보, 공급질서 교란자 명단, 당첨자 명단, 부적격자 명단, 임차인 정보, 불법 임차인 등의 정보가 필요하다. 이 안에는 2400만여명의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계좌 개설 일자 등 개인·금융 정보도 있다.
금융결제원은 감정원으로의 청약 정보 공유 또는 이관이 개인정보를 당사자 동의 없이 제3자에게 유출하는 행위와 같다고 본다. 금융결제원 관계자는 “금융실명법은 금융정보를 임의로 다른 기관과 공유하면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법무법인과 금융위 등에 문의했는데, 문제 소지가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어 “감정원에서도 정보를 공유해 달라고 공식 요청하지 않아 섣불리 나설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감정원 주장은 이와 다르다. 금융결제원이 일부러 정보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정원 관계자는 “어떤 식으로 청약이 이뤄졌는지 참고할 핵심 정보들이 전혀 공유되지 않고 있다. 사전 검증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넘어오지 않으면 본래 계획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두 기관의 상급 부처인 국토부와 금융위 판단도 엇갈린다. 국토부는 지난달 중순 행정안전부로부터 청약정보 공유에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받아 ‘갈등’이 해결됐다고 본다. 국토부 관계자는 “개인정보 관리 부처인 행안부가 청약정보 이관은 ‘업무 인수인계’와 같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금융위는 ‘자의적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공유는 가능하지만 금융정보는 더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어 법적 근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원이 민감한 금융정보를 제대로 관리할 자격이 있는지 증명돼야만 정보 공유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서로 ‘딴소리’를 하면서 10월 1일 새로운 청약 시스템을 가동한다는 정부 계획은 불가능해졌다. 국토부 관계자는 “우선 10월에 감정원이 현재와 같은 청약 시스템을 운영하고, 사전 검증 강화 등은 내년에 추진할 방침”이라며 “새로운 청약 시스템을 완성하려면 주택법을 개정해 감정원이 불법 청약을 조사할 수 있다는 ‘수사 지위’를 얻어야 한다. 법 개정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고 말했다.
세종=전성필 기자, 임주언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