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서 단체 체조·외식하는 가족… 북한 생활상 판화로 보세요

입력 2019-04-28 21:04
지난 24일 충북 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평화, 새로운 미래-북한의 현대판화전’에 나온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이 사진 맨 왼쪽 작품이 에디션 100장을 찍은 김용의 ‘독도’(2018)다. 생거판화미술관 제공

지난 24일 충북 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 산벚꽃이 화사한 분홍을 자랑하는 산자락에 있는 미술관에 ‘평화, 새로운 미래-북한의 현대판화전’ 현수막이 내걸렸다. 전시장 입구에는 자주색 유니폼의 북한 여성 노동자들이 나비 같은 몸짓으로 체조하는 모습을 담은 전시 포스터가 길 안내를 한다. 휴식 시간에 단체 체조를 하는 북한만의 직장 풍경을 담은 판화작품이다.

북한 체제 선전용 작품 일색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시장에는 이처럼 북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은 작품들이 많아 친근감을 줬다. 현대판화전답게 지난해 제작된 것이 출품되는 등 최근 10여년 사이에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작품 위주였다.

탈곡장의 남녀, 양어장에서 위생 상태를 점검하는 여성 기사, 김치 공장의 여직원…. 북한 포스터가 표어와 함께 노골적으로 체제를 선전하고 목표 달성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보다 부드러운 방식으로 ‘살기 좋은 북한’을 보여주고자 하는 듯했다. 경제난이 여전하지만 유아들과 행복한 표정으로 그림 수업을 하는 교사의 모습을 판각한 리은희의 작품이 그러한 예이다.

물론 평양의 주체사상탑, 진군하는 군인, 북송된 미전향장기수 이인모 등 체제를 선전하는 내용을 담은 칼칼한 칼맛의 흑백 판화도 나왔다. 금강산 상팔담 등 명승지와 명절 풍속놀이 등 과거 한국에서 연하장에 즐겨 그리던 주제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화가 김두량과 장승업의 대표작을 모사한 판화도 나와 눈길을 끌었다.

북한 시민들의 일상은 대체로 부드러운 다색 판화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평양 청류관으로 가족끼리 외식하러 가는 모습, 일요일 대동강변에서 낚시하는 시민들, 놀이기구를 타고 행복해하는 가족의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출품된 작품들은 평양미술대학 출신의 판화가들과 출판미술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북한에서 판화 장르는 한국전쟁 시기에 월북한 배운성(1900∼1978), 정현웅(1910∼1976), 손영기(1921∼?), 그리고 이북 출신 김건중(1917∼1971) 등이 기틀을 다졌다. 이들 이후의 20∼30년대생 2세대부터 70∼80년대생 4세대까지 60명 작가 115점의 작품이 나왔다.

박성철의 ‘체조시간’(연도 미상). 북한 판화는 체제선전 수단이어서 대학 출판화과에서 가르친다. 생거판화미술관 제공

북한 현대판화가 국내에 본격 소개된 것은 처음이다. 유화와 조선화(한국화)는 외화벌이로 수출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해외 소장자들이 더러 있었고, 전시도 자주 있었다. 반면 판화는 돈벌이용이 아니어서 그만큼 소장하기 힘든 구조였다. 이번 전시는 중국 랴오닝 아시아문화발전유한공사 이광쥔 대표의 소장품으로 구성됐다.

전시를 기획한 판화가 김준권 작가는 “유화와 조선화만으로는 북한을 제대로 보기 힘들다. 판화는 북한 사회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김 작가는 지난해 4·27 남북정상회담 때 그의 작품 ‘산운’이 판문점 선언에 서명하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뒤에 걸려 주목받았던 작가다.

김 작가는 “최근 들어 북한 판화에 에디션이 등장하는 게 특징이다. 김용의 ‘독도’는 에디션이 100장, 공훈예술가 변효찬의 ‘노장아바이’는 60장 등 50∼60장씩 찍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며 “에디션이 있다는 건 이를 구매하는 수요가 형성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진천에서 웬 북한 판화전?’하고 생뚱맞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진천은 목판화의 고장이다. 홍대 미대 출신으로 미술운동을 했던 김 작가가 28년 전 작업실을 마련한 이래 김억 류연복 윤여걸 손기환 등 40년 이상 판화 작업을 해온 6명의 작가가 진천과 안성에 둥지를 틀고 사설 아카데미인 목판대학도 운영 중이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진천=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