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5일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당장의 성과보다 정치적 상징성이 더 큰 만남이었다. 북·러가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힘에 따라 북·미 비핵화 협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중·러 결속에 맞서 한국 정부에 보다 분명한 태도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남북 관계를 개선해 북한 비핵화를 추동하겠다는 정부 구상을 실현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된다.
푸틴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적극 관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회담 결과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도 전달할 것이냐는 질문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도 비핵화를 원하고 있고 체제 보장을 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제재망을 느슨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의식한 듯 제재 완화 필요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만찬 연설에서는 “역내 핵 문제뿐 아니라 여러 이슈를 외교적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은 유일한 효율적 방법”이라며 “러시아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과의 직접 대화 구축과 남북 관계 정상화를 위한 북한 지도부의 행보를 환영한다”며 남북, 북·미 대화에 대한 지지 입장도 밝혔다.
김 위원장도 “오늘 푸틴 대통령과 조·러(북·러) 친선 관계 발전과 조선반도(한반도)의 평화 안전 보장을 위한 문제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적·동시적 비핵화를 지지해 왔다. 미 정부가 북·러 정상회담 전에 김 위원장의 비핵화 약속을 상기시키며 과거 행정부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러시아의 이 같은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비핵화 전 제재의 틈을 허용해 북한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가게 하고, 결과적으로 비핵화 시간표를 늦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라고 요구한 북한은 한동안 버티기 전략을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를 확실한 우군으로 붙잡아둔 만큼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고 제재 국면을 버텨낼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북·미 교착 상태가 더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국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3차 북·미 정상회담의 돌파구를 찾겠다는 구상이지만 북측은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를 만나 “북·러 정상회담이 북·미 회담 재개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며 “오는 6월 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만나게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조속한 방한도 함께 요청했다.
권지혜 박세환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