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을 되돌아보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떠오른다. 이 작품은 대규모의 전쟁으로 지구가 초토화된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거대한 돌연변이 생물들이 출몰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공기다. 공기 속에 유독한 기체가 가득 퍼져 있어 그대로는 숨을 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공기가 정화되는 주거 지역을 벗어나면 두툼한 마스크를 한순간도 벗을 수 없다. 내가 ‘나우시카’를 보게 된 건 고등학생 시절인 1990년대 후반이었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20년 후에는 한국인들이 만화에서처럼 집 밖에선 마스크를 써야만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믿었을 거다.
미세먼지 대책과 관련된 뉴스가 매일 등장하지만 정작 이것과 밀접한 이슈 한 가지는 그 중요성에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도시공원 일몰제다. 여기에서 도시공원은 트랙이나 운동기구가 설치된 체육시설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는 곳 주변의 이름 없는 산들을 가리킨다. 도시공원은 70년대부터 도시 지역 시민들이 자연환경을 향유할 수 있도록 집행되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공원으로 조성된 지역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현재까지 미조성 상태로 남아 있다. 도시공원으로 결정된 지역은 국가가 매입하지 않았다 해도 당연히 개발이 제한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종의 도시 내부의 그린벨트 같은 기능을 해오고 있었다.
이에 토지 소유주들의 불만이 계속 제기되어 왔고 결국 1999년 이 사안은 헌법 불일치 판정을 받았다. 개정된 법률에 따라 장기간 집행되지 않은 공원은 2020년(바로 내년이다) 7월 1일 부로 도시공원 결정에서 해제된다. 이것을 도시공원 일몰제라 한다. 2015년 도시계획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전국 도시공원 결정 면적은 643㎢이며 이 가운데 미조성 면적은 80%인 516㎢다. 이를 위한 사업비는 47조원으로 추정된다.
유례없는 환경 재앙 한가운데에 있는 지금 보자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판결이지만 헌법재판소는 적어도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은 주었다. 문제를 악화시킨 건 지난 20년간 정부와 정치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자체들은 일몰제 시행을 눈앞에 두고서야 서둘러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울시의 경우 국비 지원을 받고, 지방채를 발행하는 등의 방식으로 도시공원 전부를 매입하기로 했다. 이로써 여의도 33배 규모의 도시공원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도시공원을 온전히 유지하기로 결정한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 대부분의 지자체에선 사업비를 충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도시공원 민간 특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도시공원 중 일부를 개발하고 그 이익금으로 나머지 공원을 매입하는 방식이다. 현재 다수의 지자체들은 숲을 보존할 수 있는 대안은 고민하지 않은 채 건설사의 이익을 그대로 좇는 행정을 보여 시민사회의 우려를 사고 있다.
미세먼지 해결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지자체들이 어떻게 건강한 숲을 없애는 사업에 그토록 적극적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립산림과학원 연구에 따르면 도시숲은 도심에 비해 초미세먼지 농도가 40.9% 낮다. 나무가 미세먼지를 흡수하고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숲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미세먼지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똑같은 사안을 전혀 다르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질 때가 있다. 이번 강원도 산불로 드넓은 숲이 소실된 것을 모두 안타까워한다. 적어도 산불의 경우엔 숲에 미래가 존재한다. 학자들은 내버려두기만 해도 10~20년 후면 숲이 어느 정도의 생태계를 복원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번 민간 특례 사업이 그대로 진행되면 강원도 산불 피해 지역보다 훨씬 넓은 규모의 산들이 완전히 제거된다. 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하나의 지형으로서의 산이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엔 안타까움보다 ‘절호의 투자 기회’라는 글을 더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민간 특례 사업을 두고 도시의 허파를 팔아치우는 장기매매나 다름없다고 평하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숨 쉬는 것이 걱정스러워지는 몇 달을 보내고 나니 장기매매라는 단어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승태 르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