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입력 2019-04-26 17:36

지난 주일은 부활절이었고 내일은 부활 후 첫 주일입니다. ‘크바지모도게니티(Quasimodogeniti)’라는 라틴어 이름을 가진 주일입니다.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이란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부활이 무엇을 말하는지 암시합니다. 부활이란 이전의 생명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마치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베드로전서 1장 3절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새번역)

새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소망에 자신의 실존을 걸고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3절 후반부에서 ‘산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 소망’은 본문 4절이 말하는 것처럼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입니다.

‘산 소망’이 있다면 ‘죽은 소망’도 있습니다. ‘죽은 소망’은 ‘산 소망’과 반대로 썩는 소망이요 더러워지는 소망이요 결국에는 허무하게 낡아 없어지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죽은 소망’이 무엇인지 2014년 4월 16일,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의 최대 비극인 세월호 참사를 통해 너무나도 분명히 그리고 아프게 목도하였습니다.

오로지 입시만을 위하여 전력투구하라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 아이들은 꽃다운 청소년기의 삶을 허비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따르다 죄 없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의 죽음을 하나씩 하나씩 확인해야 했던 그 잔인한 4월을 다섯 번째 보내는 세월호 5주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5년 전 우리는 아이들의 시신이 나올 때마다 이 사회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고 아이들에게 비인간적 경쟁을 강요하며 오직 이기라고만 가르친 어른들의 가르침이란 것이 얼마나 썩은 것이었는지 보았습니다. 수면에 올라온 아이들의 시신이 장례식장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기의 성공 경험을 자부하면서 아이들의 인생을 계획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어른들의 지혜란 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이었는지 확인했습니다.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아이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른들의 능력이란 것이 얼마나 낡고 허망한 것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제자들의 마음에서 썩고 더러워지며 허무하게 낡아지는 거짓된 소망을 죽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같이 썩지도 더럽혀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산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마치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새롭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죽음도 죽이지 못하는 생명, 죽음을 삼켜버린 생명, 죽음조차 생명의 영역으로 편입시켜 버리는 부활 생명이었습니다.

저는 이제라도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거짓과 책임 전가의 태도를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세월호의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해 진행 중인 모든 과정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한패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도 헛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또한 그 아이들이 왜곡된 가치관으로 자기들을 기르고 가르친 그리고 마침내 자기들을 죽게 만든 이 시대와 대한민국, 우리 어른들의 거짓된 하늘을 찢어서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게 해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썩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고 낡아 없어지지도 않는 소망을 반드시 보게 해줄 것을 믿습니다.

◇성문밖교회는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을 위해 성문 밖으로 나아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히 3:12)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에서 소외된 생명들과 연대하는 신앙공동체가 되기 위해 1978년 3월 13일 설립됐습니다.

김희룡 목사(서울 성문밖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