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인터뷰] “비극적 죽음은 공동체 전체를 우울에 빠트려”

입력 2019-04-27 04:04
‘안녕 주정뱅이’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권여선이 중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2016)를 개작해 장편 ‘레몬’을 냈다. 사진은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 남산예술센터 제공 ⓒ이강물

슬픔에도 빛깔이 있을까. 있다면 그 색은 무엇일까. 중견 소설가 권여선(54·사진)의 신작 장편 ‘레몬’(창비)에서 슬픔은 노랑이다. 레몬은 2016년 계간지에 중편으로 발표했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2002년 미모의 여고생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세 여성의 삶에 일으키는 파장을 동심원 그리듯 추적하면서 생의 비의(悲意)를 담는다.


여동생 다언이 언니 해언의 살인사건 용의자 한만우가 취조당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권 작가는 26일 국민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다언은 비극의 당사자이자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이고 복수를 위해 행동한다”며 “천성이 아주 발랄했지만 사건 후 점점 음울하게 변한다”고 했다.

다언은 작가가 가장 감정이입을 많이 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는 2명이었다. 한 명은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한만우였다. 다른 한 명은 해언이 마지막으로 목격됐을 때 탔던 차를 운전하고 있던 부잣집 아들 신정준이었다. 하지만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동생 다언은 사건 후 표정을 잃고 영혼의 폐허 위에서 살아간다.

8년 후 다언은 용의자였던 한만우를 찾아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다언은 그를 찾아가 독설하지만 한만우와 그 동생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언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건 발생일, 한만우는 평소와 똑같이 동생에게 설탕 꽈배기를 사다 주고 일찍 잠들었던 것이다. 한만우는 집 나간 아버지를 닮지 않기 위해 어릴 때부터 고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만우는 범인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이유 없이 가혹했을 뿐이다. 다언은 한만우의 집에서 계란 프라이를 먹는다. 노랑은 이렇게 국면 전환을 알리는 주요 이미지다. “처음에 노랑은 다언에게 레몬 과자처럼 명랑한 것이었으나 그 사건으로 아픔을 환기시키는 언니의 원피스 색으로 바뀌고, 나중엔 복수를 다짐하는 빛깔로 암시되다가 다시 계란 프라이와 참외에서 치유의 빛으로 바뀐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다언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한만우를 보면서 언니의 죽음을 비로소 애도하게 된다.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이 작품은 미스터리 형식을 빌려 상실을 겪은 이들의 내면을 심도 있게 그린다. 그러면서 우리 삶에 도사린 피할 수 없는 어두움과 그 어둠을 비추는 ‘노란’ 빛이 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전한다.

작가에게도 20대 초반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친구의 죽음이 이 소설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년 넘게 소설을 쓰면서 내 내면에서 애도와 치유가 이뤄졌고, 깊은 자책에서 벗어나 슬픔을 그저 슬픔으로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떠지긴 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소설은 죽음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담고 있다. 공동체에는 어떤 파장을 일으킬까. “비극적 죽음은 공동체 전체를 우울에 빠트린다. 특히 ‘왜’라는 질문 앞에 아무 대답도 얻지 못하는 죽음이 가장 슬프다. 5년 전 일어난 세월호 참사도 그런 죽음이다. 배가 왜 가라앉았고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밝혀지면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까 우울에 잠기게 된다”고 했다.

작가로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주제는 역시 슬픔이다. “나는 여전히 우리가 겪는 고통, 슬픔에 대한 것을 가장 많이 생각한다. 삶 속에 잠복해 있는 불행들. 그리고 나이 때문인지 죽음과 차분히 죽음에 수렴해가는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이 계절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단편 ‘봄밤’을 쓴 적이 있다. 봄은 긴 겨울이 끝나고 꽃이 피고 희망이 피어오르는 계절이지만 또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그 상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역설적인 슬픔을 간직한 계절이다. 지금 곁에 없는, 꽃 지듯 져버린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든다”고 했다.

작가는 새로운 시간의 순환 앞에 설 수 없는 이들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그는 새 작품을 부지런히 쓰고 있다. 평범한 사람을 순식간에 탐욕으로 몰아가는 일확천금에의 욕망을 다룬 소설이다. 1996년 등단한 작가는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8쪽, 1만3000원.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