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지난해 3월 9일 국민일보 16면에 실린 기사는 오보가 됐다. 문제의 기사는 신경학자이자 의사였던 올리버 색스(1933~2015)의 책 ‘의식의 강’을 소개한 서평. 당시 기사엔 이렇게 적었었다. ‘의식의 강’은 “색스의 유작이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서점가에는 종종 유작 이후 진정한 유작이 나오곤 한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심정으로, 작가가 미처 발표하지 못한 글들을 그러모아 ‘진짜’ 유작이 탄생하는 것인데 ‘모든 것은 그 자리에’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저자의 팬이라면 더 이상 그의 새로운 글을 만날 순 없으니 책에 담긴 일점일획도 허투루 여겨지지 않으리라. ‘모든 것은 그 자리에’는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던 걸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으로 여긴, 불세출의 논픽션 작가가 인류에게 띄우는 마지막 편지다.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됐다. ‘첫사랑’(1부)→‘병실에서’(2부)→‘삶은 계속된다’(3부) 순으로 이어진다. 모두 33편의 에세이가 실렸는데 이 중 27편은 과거 뉴욕타임스나 뉴요커 같은 매체에 게재된 글이고, 나머지 7편은 세상에 처음 공개된 작품이다. 1부에서는 수영 도서관 박물관 등 저자가 사랑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저자 특유의 박람강기했던 재능이 어디서 시작됐으며, 그가 평생 마음을 쏟은 것들은 무엇인지 일별할 수 있다.
2부는 과학자이자 의사로서 그가 보고 들은 환자들의 갖가지 사연을 소개한 내용이다. 저자의 문명(文名)을 세상에 퍼뜨린 대표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떠올리면 된다. 특이한 병례(病例)의 사연에 살뜰한 저자의 시선이 포개진 글들이다. 마지막인 3부에서는 과학의 힘을 믿으며 우주를 동경한 저자의 삶을 되새기게 만드는 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특정 주제를 깊숙하게 파고들거나 삶의 어떤 지점에 집중한 작품이 아니니 전작들에 비하면 책의 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글의 수준이 들쑥날쑥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제법 어렵게 느껴지는 글 역시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구성이 나쁘게 여겨지진 않는다.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저자가 일군 작품 세계의 둘레를 가늠할 수 있을 테니까.
에세이 33편 가운데 인상적인 글은 한두 편이 아니다. 예컨대 자연이 때론 환자를 고치는 요술봉 같은 역할을 한다는 내용이 담긴 글 ‘정원이 필요한 이유’가 그렇다. 저자가 4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만성 신경병 환자에게 약물을 쓰지 않고도 주효했던 치료법은 음악과 정원, 두 가지였다고 한다. 정원이라고 적었지만 사실 이 단어는 자연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가령 투렛증후군 환자였던 저자의 친구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속사포 같은 고함을 내지르고 주야장천 무언가를 만지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사막을 하이킹할 때는 이런 증상이 사라지곤 했다. 괌에서 만난 한 여성은 파킨슨병 환자였다. 그런데 이 여성은 식물원에 데려가자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바위를 “신속하게” 오르내렸다고 한다.
저자는 “정원과 자연의 효능이 의약품보다 뛰어난 경우도 많다”며 “자연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뭔가에 말을 거는 게 틀림없다”고 썼다. “자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의 범위는 영적 정서적 측면뿐 아니라, 생리학적 신경학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나는 그것이 뇌의 생리학은 물론 어쩌면 구조에도 심오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치매에 걸린 노인들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삶의 마지막이 어때야 하는지 살핀 ‘나이든 뇌와 노쇠한 뇌’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뇌가 건강하려면 최후의 순간까지 활발하고 경이로워하고 놀고 탐구하고 실험해야 한다”고 썼다. 이런 대목을 읽으면 어쩔 도리 없이 생의 막바지까지 글을 쓰고,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수영을 하고 음악을 즐긴 저자의 삶을 되새기게 된다.
삶은 계속된다
저자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제일 흔한 수식어는 ‘의학계의 계관시인’이었다. 그의 어떤 글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고, 모든 저서에는 문학적인 기품이 묻어났다. 그렇다고 저자가 탁월한 미문을 구사한 작가였던 건 아니다.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러면서 인간을 향한 애정이 깃든 글을 속속 내놓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문화계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신작이자 유작인 이번 작품에서 최고작을 고르라면 끄트머리에 실린 ‘삶은 계속된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거리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저자는 이것을 ‘조그만 상자’라고 적었다)에 홀려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인간의 삶이 비인간적인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사회와 문화에서 언제부턴가 유의미하고 친밀한 접촉이 너무나 만연하게 다 빠져나가 버렸다”면서 “디지털 생활 중독”을 “신경학적 재앙”이라고까지 규정한다.
그렇다면 그는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내다볼까. “세상을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신뢰한다. 인류와 지구는 생존할 것이고, 삶은 지속될 것이며, 지금이 인류의 마지막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좀 더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를 우리글로 옮긴 번역가 양병찬은 책이 출간된 지난 23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쉬운 글부터 어려운 글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이번 책”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올리버 색스의 새로운 글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쉽다”면서 “이번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과학이 인류를 구할 것이라는 저자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책에는 이성의 힘을 믿고 과학을 신뢰한 저자의 굳건한 신념이 담겨 있다. 그는 “인간의 삶과 문화적 풍요는 생존할 것이라는 희망을 감히 품는다”면서 이렇게 적어두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을 문화의 방어벽이나 인류의 집단 기억으로 간주하지만, 나는 심오한 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과와 잠재력을 가진 과학도 그와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좋은 과학’이 전례 없이 번성하고 있으며, 훌륭한 과학자들이 앞장 서서 조심스레 서서히 움직이며 지속적인 자기 검증과 실험을 통해 통찰력을 점검받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 같은 인간의 미덕을 바탕으로 수렁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라고 생각한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