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상대평가 유감

입력 2019-04-25 00:08

이번 주 대학교는 중간고사 기간이다. 교수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문제를 내며 고민할 수밖에 없다. 결국 비비 꼬아서 어렵게 출제하고 만다. 상대평가 시스템 때문에 학생들의 성적 불만 요청을 최소화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충분한 지식과 의견을 제출하면 마땅히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지만, 한국의 모든 대학교는 정해진 인원만 A학점을 받을 수 있다. 더 잔인한 것은 3분의 1 정도의 학생은 무조건 C 이하 학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예외는 없다.

이 무시무시한 숫자는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 등급을 부여한다. 누구는 A, 누구는 B, 그리고 누구는 C라고 말이다. 치열한 대학입시 경쟁을 치러야 하고 보편적 교육을 시행한다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각자의 취향을 찾고 자유로운 의견과 생각을 배우는 대학 교육에 상대평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누가 이런 무자비한 학제를 만든 것일까. 누군가는 절대평가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어쩔 수 없는 제도라고 변명하겠지만, 난 그것이 상대평가의 문제점보다 더 심각하진 않다고 확신한다.

19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내 기억에 이런 의무적 상대평가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학 시절 미국에도 없었다. 다만 교수님의 성향과 과목의 특성상 학생들에게 C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이는 나의 태만과 부족함의 결과였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대평가는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을 살벌한 경쟁상대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 대학시험에 부정행위자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설사 있다 해도 동료에 의해 바로 고발당하기 일쑤다.

학기 초에 대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런 질문이 자주 올라온다. “A교수님 수업 어때요. 혹시 ‘팀플’(그룹과제) 있나요.” 오늘날 대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과제가 그룹과제다. 누군가는 고생하고도 다른 팀원으로 인해 손해를 보거나 누군가는 무임승차하며 쉽게 점수를 따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차별에 찬성한다”는 말의 의미도 이런 맥락이다. 이들이 마주한 경쟁이 너무나 극심해 생겨난 시대 정서인지 모른다.

유학 시절 만난 한 지도교수님은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나는 여기 있는 모든 학생에게 A학점을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학기가 진행되며 환호성은 곧 신음으로 바뀌었다. 이분은 학생이 A학점을 받을 때까지 과제를 다시 쓰게 했다. 결석을 하면 무거운 과제로 출석을 메우게 했다. 시험 역시 잘못 본 사람에게 계속 재시험을 치르게 했다. 물론 문제는 이전보다 어려워진다. 하지만 못 따라가는 학생들에겐 동료들의 도움을 주선해 줬고 스스로 과외 공부 지도까지 해주며 격려해줬다.

이분은 이렇게 자신의 교육철학을 말씀한다. “학생들이 A학점을 받는 것이 의무라면 선생으로서 모든 학생을 A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제 의무입니다.” 이 교수님께 세 과목을 배웠다.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모두 A학점을 받았다. 지금도 이 과목들의 지식과 통찰이 내 머리와 가슴에 또렷하다. 나도 언젠가 교수가 된다면 이렇게 수업해야지 다짐도 해봤다. 그런데 웬걸!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단다. 몇 번을 학교 측에 요청해도 대답은 한결같다. 시스템이 원래 그렇다고. 도대체 그 시스템이란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나는 진정한 배움은 공동체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혼자 책 읽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독서모임을 통한 토론과 나눔은 혼자 얻을 수 없는 지혜와 통찰을 만나게 한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공부는 재미있다. 모든 사회 변혁의 배후에는 독서모임이 있었던 것처럼 함께 나누는 배움의 힘은 개인을 넘어 사회로 확장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에 이런 상대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의 조건을 상대평가로 걸어두신다면 현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플까 상상해보라. 나는 계속 상대평가에 대한 유감을 말할 것이다. 내 수업의 모든 학생이 시스템적인 경쟁 없이 서로가 서로를 배우며 정당한 학점을 받게 될 날까지. 사회의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대학에서만큼은 그랬으면 좋겠다.

윤영훈(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