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백종우] 문제는 조현병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입력 2019-04-23 04:02

고 임세원 교수의 100일 탈상을 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 17일 경남 진주 방화·살인사건으로 희생된 다섯 분과 유족들께 깊은 슬픔과 애도를 전한다.

2016년 서울 강남역 사건, 2018년 7월 경북 경찰관 사망사건, 2018년 12월 31일 임세원 교수 사건 등에 이어 또 지역사회에 방치된 중증 정신질환자에 의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숫자는 전체 강력범죄 중 매우 적고 피해자도 대개 가족이지만 국민의 머릿속에는 각인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들은 아무 원한관계도, 이해관계도, 어떠한 잘못도 없이 희생되었고 이럴 때마다 환자들을 격리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이해할 수 있지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럴 때 중증 정신질환 환자와 보호자들은 누구보다 불안해한다. 그러다 치료가 중단되면 다시 모두가 위험해진다.

문제는 조현병 질환 자체가 아니라 빈약한 정신건강 시스템에 있다. 주변 이웃들이 일곱 번이나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미국처럼 경찰이 매년 정신응급에 대한 교육을 수료하고 지역사회정신응급출동팀의 도움을 받았다면, 일본과 대만같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핫라인과 출동 시스템을 통해 경찰이 현장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경찰이 보건복지부와 협력해 개입해야 한다.

피의자의 형은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2주일 전 입원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런데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은 거절된다. 형은 직계가족이 아니므로 동생의 강제입원을 신청할 권한이 없다. 유일한 직계가족인 어머니는 수술로 입원 중이었다고 한다. 경찰을 통한 응급입원과 시청에 행정입원도 문의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고 한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인 어떤 나라도 이런 경우는 없다. 해외에서 가족은 강제입원 신청의 주체이지 동의권자가 아니다. 가족 외에도 주변의 이웃 등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그러면 법원(미국, 프랑스)이나 정신건강심판원(영국, 호주)에서 본인과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국가가 입원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자는 요구는 여전히 답보상태이며, 가족에게 과도한 책임감을 부여하고 있다. 여전히 입원은 물론이고 퇴원도 가족이 결정해야 한다. 경북 경찰관 사망사건과 임세원 교수 사건도 자의퇴원 후 치료가 중단돼 급성 증상이 악화된 상태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오랜 기간 이 모든 것을 가족이 감당해 왔다. 핵가족화와 함께 30, 40대 중증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의 부모는 연로하거나 돌봐줄 여력이 없고, 형제자매는 기껏 한두 명인데 가족끼리 따로 사는 비율은 급증하고 있다. 더 이상 정신질환자의 가족에게 모든 짐을 부여해서는 안 되는 인구구조이다. 돌볼 사람이 없으니 퇴원을 못하고 장기간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지금부터라도 시·군·구청장 책임 하에 행정입원을 진행해야 한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에 따라 가능하지만 보호의무자가 있는 경우 시·군·구청장이 먼저 나서기를 꺼려 가족 없는 환자 외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일본은 시·군·구가 행정입원 비용을 부담하며 그중 4분의 3을 국비로 지원하는데, 우리는 아직 예산을 편성한 곳이 거의 없다.

선진국에서 지역사회 중심으로 치료와 지원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은 이 같은 안타까운 사고를 겪고 난 다음이었다. 일본은 1963년 라이샤워 미국 대사를 조현병 청년이 공격한 뒤 정신과치료외래지원제도를 도입,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이탈리아는 정신장애로 인한 장기입원을 줄이고 지역사회진료를 위해 1978년 국공립정신병원의 새로운 입원을 금지하는 바실리아법을 만들었다. 이후 20년에 걸쳐 인구 10만명당 한 곳꼴인 1200개 이상의 정신건강센터를 설치, 주거와 함께 중증 정신질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게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많은 환자들이 퇴원했지만 자살과 타인을 해하는 일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가해자에게 처벌은 필요하다. 하지만 아픈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몰리는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이런 일은 또 발생할 것이다. 임세원 교수의 유족은 ‘안전한 진료 환경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쉽게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고인의 유지라고 밝힌 바 있다. ‘임세원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개정법안과 제도는 외래치료지원제도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국회와 예산 당국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빈약한 정신건강 시스템의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생명’과 ‘인권’의 문제다.

백종우 경희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