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직후부터 투사적인 외교관들을 앞세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이어갔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으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했고, 황기환은 유럽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황기환의 뒤를 이은 서영해는 임시정부의 대유럽 외교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이승만은 대미 외교를 주도했다.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읽은 김규식
김규식은 1919년 4월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에 선임된 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파리강화회의는 1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처리에 관한 회의였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당시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깨뜨릴 수 있는 ‘민족자결’을 강조했다. 식민지 신세로 고통받던 약소 민족들은 이 민족자결에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식민지에만 적용됐고, 승전국인 일본은 예외였다.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에서 유학을 한 김규식은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읽었다.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공식 참석하는 것과 그곳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신 파리강화회의를 임시정부 외교활동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로 삼은 김규식은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와 프랑스 유력 인사들을 만나 한국의 처지를 설명하고 지지를 얻어내는 데 주력했다. 또 각국 언론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압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각국 대표들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김규식은 그해 8월 미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맡았고, 이후엔 임시정부 부주석에 올랐다.
유럽에서 맹활약한 황기환
황기환은 파리강화회의 이후 1920년대 초반까지 임시정부의 유럽지역 외교를 실질적으로 도맡았다. 17~18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던 황기환은 1917년 미군에 입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미군 소속으로 유럽에 있던 황기환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러 파리에 와 있던 김규식으로부터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이 제안에 응한 황기환은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부 서기장이 된다.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난 뒤 황기환은 유일하게 파리에 주재하면서 대유럽 외교활동을 펼쳐나간다. 한국대표부는 파리위원부로 개편됐고 황기환은 이를 실질적으로 책임졌다.
그는 1920년 임시정부 런던위원부 위원직도 맡아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잡지 ‘자유한국’을 발간하는 등 한국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유럽에 형성하는 데 힘썼다.
이후 황기환은 이승만의 요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나 1923년 심장병으로 숨졌다. 그의 죽음으로 임시정부의 대유럽 외교활동은 한동안 침체에 빠졌다.
역사소설로 한국을 알린 서영해
서영해는 1929년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임시정부 파리특파원 및 주불대표위원을 역임하면서 1930, 40년대 유럽지역 외교활동을 홀로 이끌었다.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춘 서영해는 역사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ne)’을 출간, 일약 유럽에서 주목받는 지식인이 됐다. 그는 3부로 구성된 ‘어느 한국인의 삶’을 통해 한국의 역사·문화와 독립운동을 알렸다. 특히 가상인물인 박선초를 주인공으로 한 3부에서는 3·1운동을 다루면서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이 소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도 언론을 통해 이 책이 소개될 정도로 유럽에서 서영해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당시 ‘미국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난 서영해는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인 1920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국제 외교무대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지만 임시정부에선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전무했기 때문에 서영해는 프랑스 유학을 택했다. 그는 프랑스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외교활동에 뛰어든다.
그는 임시정부 주불특파위원으로 1936년 벨기에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40여개국 대표들에게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등 유럽을 종횡무진 누볐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파리가 나치 치하에 들어가자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임시정부에 유럽의 동향을 전했다. 이때 그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체포돼 6개월간 감금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파리에서 광복을 맞은 서영해는 1947년 고국으로 돌아와 백범 김구와 함께 활동했다. 그는 파리로 가기 위해 중국에 들어갔다가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과거 망명 이후 중국 여권을 써왔기에 중국 국적으로 분류됐다.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서영해는 프랑스 저명 인사들과 폭넓게 활동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단기필마로 당시 국제연맹이 있던 유럽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며 “서영해의 독립운동은 이제부터 더 연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