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벼락 ‘급성 백혈병’ 업무 연관성 판정… 산재 신청도 지원

입력 2019-04-22 21:12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김희제(왼쪽 두번째) 교수 등 의료진이 지난 18일 지난해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은 50대 남성에게 치료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환자는 진단 당시 직업환경의학과 협진 진료를 받았다.

오랫동안 건설현장에서 배관과 용접, 도색 일을 해 온 40대 A씨는 지난해 봄 치명적 혈액암인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한창 일할 나이여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겐 날벼락이었다. A씨는 항암치료를 위해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에 입원하면서 직업환경의학과에 협진의뢰됐고 암 발생이 업무와 연관성 높은 것으로 판단됐다. A씨는 배관 작업 시 납 등 중금속이 포함된 페인트를 많이 취급했고 작업을 마친 뒤 손과 얼굴에 묻은 페인트를 시너로 닦아내는 일을 계속해 왔던 것. 더구나 환기시설 없는 건물 지하의 밀폐 공간에서 도색 작업을 하며 유기용제에 보호구 없이 노출됐던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결국 6개월만에 숨졌다. 장례절차를 마무리한 유족은 병원에서 업무 관련성 소견서를 받아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을 신청하고 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반도체 작업장에서 3년 넘게 연구원으로 일한 30대 B씨도 2년 전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려 투병해 오다 올해 초 세상을 떠났다. B씨의 병 역시 직업과 관련성이 높다는 의료진 평가를 바탕으로 가족이 산재 신청을 했다.

작업 환경에서 노출되는 각종 유해물질에 의해 특정 직업군이나 작업 공정의 근로자에게 많이 생기는 이런 ‘직업성 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악성중피종(흉막에 생기는 암), 폐암, 백혈병, 방광암, 후두암, 부비동암(코암) 등이 대표적 직업성 암으로 꼽힌다. 암 발생과 인과관계가 확실히 밝혀진 물질은 석면, 벤젠, 톨루엔, 6가크롬불용성화합물 등이다. 방사선과 분진, 전자파, 중금속에의 지속 노출도 암 위험을 높이는 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급성 백혈병의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벤젠·페인트·살충제 등 화학약품, 잦은 방사선 노출력 등이 지목돼 왔지만 그간 업무와 연관성 인정 노력은 부족했다. 발병의 환경·직업적 요인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 인식이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년간 반도체 근로자의 백혈병 발병 및 사망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비슷한 사례에서 직업 관련성을 확인하고 산재로 인정받으려는 환자와 가족들의 니즈(요구)가 많아졌다.

이에 발맞춰 국내 최대 혈액병원을 운영하는 서울성모병원은 지난해 6월 국내 처음으로 ‘직업성 혈액암 진단 협진 클리닉’을 열었다.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혈액병원에 입원하거나 외래 진료를 받는 환자들을 직업환경의학과에 의뢰해 직업·환경 관련성을 밝히고 ‘직업성 암’ 여부를 판정한다. 아울러 환자와 가족들의 산재 신청을 지원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강모열 교수는 22일 “과거 직업성 암 감시체계라는 연구과제를 수행한 적 있으나 지금처럼 정규 진료 프로세스에 전문 협진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국내 의료기관 최초”라고 말했다.

피를 만드는 조혈세포에 암적 변이가 생기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은 악성 림프종에 이어 두 번째로 흔하다. 국내에서 연간 1000~1500명씩 새로 발생한다. 진행 속도가 빨라 진단 후 수개월 안에 목숨을 잃는다. 조혈모세포(골수)이식 등 치료를 해도 3명 가운데 2명은 3년을 넘기지 못한다. 글리벡 같은 효과적 표적항암제가 개발돼 지속 치료하면 완치까지 가능한 만성골수성백혈병과는 달리, 급성백혈병은 개발 중인 표적치료제가 아직 임상시험 단계이고 일부 출시된 제품은 건강보험 적용이 안돼 사용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 병원 혈액내과 김희제 교수는 “급성 백혈병은 인구 고령화와 매우 밀접해 평균 발병 연령은 68세 정도지만 최근 가족력(다운증후군 등 염색체 이상 질환)이나 기저질환 없이 갑자기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리는 젊은 환자들도 꽤 된다”고 설명했다.

혈액병원은 지난해 6월부터 12월말까지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새로 진단받은 111명을 직업환경의학과에 협진의뢰했고, 그 가운데 19명이 업무상 사유로 질병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돼 산재 신청을 안내했다. 19명 가운데 업무 관련성이 매우 높다고 판정된 5명은 산재에 따른 요양이 필요하다는 소견서까지 발부해 줬다. 이들의 직업은 폐수처리업, 페인트 도장작업, 타이어제조업, 실험실 연구 종사자 등이었다.

직업·환경 관련성을 평가하는 프로토콜은 국제암연구소(IARC)와 미국산업위생협회 등 국제 기준을 활용해 만들었다. 노출된 발암 물질의 종류와 노출 기간, 강도, 잠복기 등을 고려해 직업성 암 확률이 매우 높음(Definite), 직업성 암일 확률 50% 이상(Probable), 직업성 암 확률 있으나 50% 미만(Possible), 직업성 암 확률 낮음(Suspicious)으로 판정한다.

다만 직업성 암의 산재 승인 여부는 근로복지공단이 결정한다. 산재 승인에는 여러 조사 과정이 필요하므로 대부분 1년 이상 걸리며 인정이 쉽지는 않다.


실제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직업성 암 산재 승인율은 2017년 기준 61.4%(190건)에 그친다. 2013년 38.9%, 2014년 40.0%, 2015년 48.9%, 2016년 58.8%로 승인율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강 교수는 “안타까운 건, 자신의 암이 산재로 혜택받을 수 있다는 걸 잘 몰라서 산재 신청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라면서 “산재 승인 여부가 암 걸린 것을 되돌릴 순 없지만 경제적 지원을 통해 생활안정에 도움이 되는 만큼, 자신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통해 공정한 보상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보가 부족한 많은 직업성 암 환자들에게 산재 승인 절차 안내와 승인 여부를 가를 쟁점 상담, 심의 시 참고가 될 의학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교수는 아울러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에 국한돼 진행해 왔던 직업성 암 협진 시스템을 올해 만성백혈병과 악성림프종으로 확대하고 향후 급성백혈병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큰 다른 혈액질환(재생불량성빈혈, 골수이형성증후군)과 폐암, 방광암 등으로까지 넓혀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사진=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