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에 “배뇨·배변 문제 없나” 엉뚱한 질문

입력 2019-04-19 04:01
이은희 캘리그라피 작가가 1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제39회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포용으로 꽃 피는 행복한 동행’ 글귀를 붓으로 쓰고 있다. 이 작가는 1992년 건설현장 건물 붕괴 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를 갖게 됐다. 윤성호 기자

제39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이 열린 1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 앞, 휠체어를 탄 이형숙(53)씨가 도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마을버스가 급정차하며 낸 경적소리 뒤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씨는 “‘장애등급제 폐지’라는 슬로건이 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정부의 과업 홍보 수단’이 됐다”고 외쳤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이날 ‘등급제 가짜 폐지 규탄대회’를 열었다.

장애계의 숙원이었던 등급제 폐지가 3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장애인단체와 정부 사이 갈등이 오히려 깊어지고 있다. 지난 15일 보건복지부가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사용될 ‘종합조사표 최종안’을 공개하자 장애인단체들은 단체행동에 나섰다. 장애계는 등급제가 명칭만 사라졌을 뿐 이전과 다를 바 없다고 분노한다. 전문가들도 “정부안이 장애 유형별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2017년 장애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던 등급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등급제는 하나의 일률적 기준으로 다양한 유형의 장애를 재단하기 때문에 지원에서 소외되는 장애인이 나온다’는 장애계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정부는 유형에 따른 맞춤형 지원 서비스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가 발표한 ‘장애인 활동 지원 종합조사표’가 기존 지표와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 장애계 내부에서 나온다. 등급제가 폐지되면 장애인들은 지원을 받기 위해 옷 갈아입기, 배변·배뇨, 약 챙겨먹기, 빨래하기, 주의력, 돌발행동 등 36개 항목에서 ‘남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결정해 4단계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 점수 총합에 따라 활동보조사 지원 시간이 결정된다.

장애계는 ‘15개 장애 유형에 따라 지원이 필요한 영역이 달라지는데 이러한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 조사표’라고 비판한다. 정신장애인에게 ‘배변·배뇨에 지원이 얼마나 필요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답하게 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정신장애인은 화장실로 이동하는 게 힘든 것이지 배변·배뇨 자체는 힘들지 않다. 이에 해당 항목 질문에 낮은 단계의 점수를 답하면 활동보조사 지원 시간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신장애인도 중증 장애인처럼 볼일을 보는 데 남의 도움이 필요한데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음식물 넘기기’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등 본인과 전혀 상관 없는 항목에 답해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영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부회장은 “시각장애인에게 ‘구강 청결, 배변·배뇨를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게 과연 ‘맞춤형 복지’냐”며 “‘낯선 장소에서 화장실 위치를 찾는 게 가능한지’ ‘자필로 서류 작성이 가능한지’ 등 시각장애인 맞춤형 조사지표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문희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사무차장은 “일상생활에 부여된 총 배점은 300점인 반면 ‘직장생활’ ‘학교생활’ 등 사회활동에 부여된 배점은 20여점에 불과하다”며 “장애인은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면 지원이 필요 없다는 의미냐. 중증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괄적 평가 지표의 가장 큰 피해자로는 신장장애인 등 내부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이 꼽힌다. 이들은 이제까지 중증 장애인 지원에 밀려 활동보조사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영정 한국신장장애인협회 사무처장은 “1주일에 세 번 체내 피를 모두 갈아야 해서 당일엔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며 “맞춤형 복지가 된다고 해서 우리도 활동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또 다시 소외될 처지다. 일부 회원이 조사표에 답해봤더니 활동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정책시행 결과 시뮬레이션에서조차 정신장애인과 내부장애인을 제외했다.

정부는 “장애 유형 간 활동 지원 필요 정도를 비교해야 하므로 15개 장애 유형별 평가지표를 모두 만들 수는 없다”며 “대신 평가지표를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에 대한 매뉴얼에 장애 유형별 특성을 반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미흡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조한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15개 장애 유형 특성을 모두 조사표에 담을 순 없겠지만, 인지장애·지체장애·발달장애 등 큰 주제로 분류해 3~4개의 서로 다른 조사표는 만들 수 있었다”며 “목소리가 큰 장애인 단체들 눈치만 봐 ‘땜질식’ 처방으로 대안을 마련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