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말은 중요한 일을 하려는데 반응이 없는 사람들을 나무라는 맥락에서 자주 쓰인다. 그러나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동네 장터에서 아이들이 논다. 몇몇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한다. “결혼식 놀이하자!” 몇 아이들이 피리를 불고, 하객, 들러리 역할에 나선다. 저기서 구슬놀이, 딱지치기 하는 아이들, 조용히 앉아서 햇볕 쬐고 싶은 아이들에게도 “야, 너희들 뭐해. 지금 결혼식 놀이하는데!”라고 강요하는 상황 말이다. 그러다 결혼식 놀이가 시들해지면 장례식으로 분위기를 바꾼다. 이제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가슴을 치고 슬퍼하는 척할 것을 요구 받는다. 동네 골목대장이 축구하고 싶으면 다 축구해야 하고, 시시하다 술래잡기하자 하면 또 그걸 따라해야 하는 골목의 독재를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쪽은 예수가 아니라 바리새인 등 당시 사회의 기득권자들이다. 금욕주의자인 세례요한에게는 왜 춤추지 않느냐고 비판했고, 함께하는 식탁의 즐거움을 중요시했던 예수님에게는 왜 울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의 문화권력을 동네 골목대장들의 권력행사에 빗대어 말씀하셨다. 미셸 푸코는 권력이 중앙의 정치권력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다층적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골목놀이를 주도하는 아이들은 푸코가 말한 ‘미시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만 해도 남자들이 머리를 기르면 경찰이 단속하고, 여자들이 미니 스커트 입는 것을 경찰이 길이까지 재어 가면서 금지했었다. 국가권력의 전근대적 행사방식이다. 이제 더 이상 권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특정 행위나 라이프 스타일을 열등하거나 촌스럽다고 규정하는 방식으로 문화권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권력 가운데서 사회 중심부에 있는 이들의 문화적 권력은 강화되고 상업주의의 지배가 관철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이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예수와 세례요한을 미친 사람으로 몰았다. 그 시대에 가장 창조적인 인물들을 자신들과 다르다고 해서 배제하려 했다. 그리고 죽였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는 화합하고 화목하되 남들에게 똑같아지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은 점이 많아도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똑같아질 필요가 없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화합이라야 진정한 화합이다.
“그들은 사막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아그리콜라에 나오는 말로, 지금의 스코틀랜드 지역의 한 족장이 팍스 로마나를 두고 한 말이다.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균일한 문화가 로마의 평화라면 예수님의 평화는 각자가 나름의 생각과 라이프 스타일, 피부색깔과 문화를 갖고 참여할 수 있는 평화였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평화를 공동체의 삶에서 구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출발했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쉽게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바울은 안디옥이라는 도시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동일한 자격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한 상에서 함께 밥 먹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유대인들과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는 신념이었다. 바울식의 화이부동이다.
세계는 급속하게 다양화되어 가고 있다. 오랫동안 단일문화라는 틀에 갇혀 살던 한국인들에게 이 도전은 거세다.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다양성을 포용하는 훈련을 해야 할 때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