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상승률이 3개월째 ‘0%대’를 찍고 있다. 저물가 상황이 계속되자 ‘디플레이션 공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물가는 상품을 사려는 수요와 팔려는 공급이 만나 결정된다. 디플레이션은 ‘수요 급감→가격 하락→생산 위축→경제 공황’이라는 악순환 고리가 작동하는 경제현상이다. 경제 전체 영역을 뒤흔드는 소용돌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경제의 저물가는 디플레이션의 예고편일까. 전문가들은 아직 디플레이션을 말하기는 이르다고 본다. 최근 저물가 상황을 들여다보면 ‘가계비 경감 대책의 딜레마’가 보인다는 진단이다. 의료비·공공요금 인하 등 가계비 부담을 덜어주는 정부 정책이 전체 물가 인상을 누른다는 지적이다. 이런 ‘관리 물가’를 걷어내면 올해 1분기 물가상승률이 1%대 중반까지 올라간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통계청은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0.4%, 근원물가(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지수)의 상승률은 0.8%라고 17일 밝혔다. 물가가 낮다는 건 상품 가격이 그만큼 덜 올랐음을 의미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소식이다. 다만 전체 경제를 생각하면 좋지만은 않다. 경제 주체가 지갑을 열지 않자 상품 가격이 하락한다고 볼 수 있어서다. 가격 하락은 생산 위축을 부르고 고용 감소와 임금 하락에 이어 경기 침체를 유발한다. 최근 저물가의 이면에도 수요 부진이 깔려 있다. 올해 2월 식료품, 승용차, 의복 등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0.5%, 전년 대비 2.0% 줄었다.
그러나 공급 측 요인도 일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관리 물가 때문이다. 정부는 전기·수도·가스요금, 의료비, 통신비, 교육비 등의 가격이 크게 오르지 않도록 관리한다. 소비자물가지수 조사대상 품목 460개 중 관리 물가 대상은 40개로 추정된다. 정부는 통신비와 등록금 인하 등을 꾸준하게 추진해 왔다. 문재인정부 들어서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무상급식·무상보육 등을 더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관리 물가, 즉 가계비 경감 정책은 좋은 복지 정책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물가를 끌어내리기도 한다. 지난달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무상급식 시행은 학교 급식비를 41.3%나 낮추면서 전체 물가상승률을 낮췄다. 한국은행은 관리 물가를 제외하면 물가상승률이 2016년 이후 1.9%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정부 안팎에서는 올해 1분기 물가상승률이 0.5% 수준이지만, 관리 물가를 제외하면 1%대 중반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관리 물가가 1% 포인트까지 물가상승률에 변동을 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온라인 구매(온라인 쇼핑) 증가가 전체 물가를 끌어내리는 ‘아마존 효과’가 작용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아마존 효과는 연평균 0.2% 포인트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를 종합하면 최근 저물가에 ‘착시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현재 상황을 디플레이션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대신 정부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물가지표는 통화 정책 등 각종 경제 정책의 기준점이다. 저물가라고 가계비 경감 정책을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 결국 관리 물가를 걷어낸 물가 추이를 살피면서 수요를 살리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저물가는 수요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공급 측 영향도 있는 것 같다”며 “아직 디플레이션을 말하기 이른 상태이기 때문에 향후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전슬기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