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전력이 있는 40대 남성이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른 뒤 이를 피해 나온 이웃 주민들을 잔혹하게 해친 범죄가 17일 발생했다. 12세 여학생을 포함해 노약자 등 5명이 숨졌다. 범행 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리 흉기를 준비한 계획범죄여서 충격을 주고 있다. 피의자는 평소 주변에 분노를 표출하며 문제를 일으켜 왔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바탕으로 ‘다수살인’(매스킬링·Masskilling)을 저지르는 증오범죄”라고 봤다. 정상 사회에서 소외된 외톨이, 이른바 외로운 늑대(Lone wolf) 범죄의 전형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비슷한 유형의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잔혹함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사회적 분노를 낮추고 소외된 개인을 품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남 진주경찰서는 17일 자신의 아파트 방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뒤 대피하던 이웃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을 숨지게 하고 13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혐의(살인 및 방화)로 안모(42)씨를 현장에서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안씨는 동트기 전인 오전 4시29분쯤 불을 냈다. 이후 복도와 계단 등에서 대피하던 무방비 상태의 주민 11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70대 남성 1명, 60대와 50대 여성 각 1명, 18세와 12세 여학생이 숨졌다. 나머지 6명은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화재로 인한 연기를 흡입하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은 입주민 7명도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경찰은 안씨가 방화한 뒤 흉기를 챙겨 미리 2층으로 내려가 주민들이 대피하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아파트에는 중앙에 계단이 있는 복도식으로 총 80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아파트는 삽시간에 공포의 공간이 됐다. 범행 과정에서 잠을 깬 주민 다수는 겁에 질려 옥상 등으로 대피했다. 목격자들은 “계단에 피가 흥건했다”고 말했다. 흡사 해외의 무차별 총기 난사 현장 같은 상황이었다. 경찰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뒤 아파트 2층 복도에서 흉기를 던지며 대항하던 안씨를 오전 4시50분쯤 검거했다. 그는 2015년 12월 이사 와 혼자 살고 있었다. 조현병 관련 진료를 받은 전력이 있었고, 층간소음 등을 이유로 위층 입주민 등과 여러 차례 다퉜었다.
이번 사건은 사전에 방화물질, 흉기 등을 준비하고 대피하는 주민들을 기다렸다가 살해하려고 철저하게 계획됐다는 점, 12세 여학생까지 희생시킨 잔혹성 등에서 충격을 준다.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이 홧김에 우발적으로 칼부림을 벌인 사건과는 성격이 다르다.
‘묻지마’식 잔혹 범죄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차례 발생했다. 2008년 서울 논현동 고시원에 살던 정모씨가 자신의 침대에 불을 낸 뒤 대피하던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13명이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서울에선 40대 남성이 편의점에서 이유 없이 목검과 흉기를 휘둘러 시민 2명이 다쳤다. 지난해 10월 경남 거제에서 20대 남성이 50대 여성을 때려 숨지게 한 일도 있었다. 서울 강서 PC방 살인사건도 다르지 않다. 사회적 외톨이에 의한 범죄가 반복되고 점점 ‘일상 공간’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예측이 어렵고, 범행시간 해당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감은 크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사회에서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증오를 가진 이들이 벌이는 ‘외로운 늑대’형 범죄로부터 한국 사회는 안전하지 않다”며 “이번 사건도 피의자가 자아통제력이 약한 상태에서 부정적 경험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살인과 방화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묻지마 범죄를 단순히 조현병, 사이코패스 등 개인 문제로 치부해버리지 말고 사회적 원인을 파악해 그에 맞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사회에 대한 증오가 해소되지 못해 범죄로 이어졌다고 봐야 한다”며 “묻지마 범죄는 증오의 ‘방아쇠’를 당기지 않도록 하는 정책 수립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 갈등 해소 등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누구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했다.
최예슬 기자, 진주=이영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