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기사에는 늘 비난의 댓글이 달렸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래서 뽑아봤다. 베스트 댓글 2개. “기자야, 너도 집 있지?” “기자야, 너도 제발 집 좀 사라.” 이를 베스트로 분류한 이유는 기자를 어느 순간 유주택자로 규정하거나 무주택자로 만드는 모순된 댓글들에서 한국 부동산의 서글픈 현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유주택자에게 유리해 보이는 기사를 쓸 경우 댓글에 가장 많이 달리는 비난의 말이 ‘너도 집 있구나’였다. 반대로 무주택자에게 좋아 보이는 기사를 쓰면 달리는 댓글은 ‘집이 없어 억울하냐’는 식이었고.
모순의 상황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속 ‘코코넛’에 투영됐다.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영화에 담아온 켄 로치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주제를 말한다. 기초수당을 받아야 하는 가정의 어린 소년에게 질병수당을 받으려는 노년의 주인공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코코넛과 상어 중에 사람을 더 많이 죽인 것은?” 예상을 뒤집는 답. 코코넛이다. 영화는 위협적 존재인 상어보다 살상이라고는 할 것 같지 않은 코코넛의 존재가 더 위험하다면서도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열린 결말을 통해 관객이 각자의 상황을 투영해 해석해 보라는 감독의 배려다. 다만 이 영화의 주제와 연결해 설명한다면 코코넛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의 안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복지체계가 사실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감독의 의도대로 코코넛의 위험성을 부동산 현실에 맞춰 봤다. 켄 로치 감독의 코코넛은 높은 나무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사람을 해하지만 부동산 현실 속 코코넛은 위협의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단 정부 정책이라는 이름의 코코넛은 저 위에서 떨어졌다. 주거복지라는 타이틀을 건 부동산 정책은 ‘고강도’라는 수식어 그대로 타격의 강도가 셌다. 급등세를 보이던 부동산 가격은 잠잠해졌지만 예측할 수 없는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서울보다 지방의 집값이 더 떨어졌다. 집값보다 전세가가 더 높은 ‘역전세’도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코코넛이 앞에서도 옆에서도 날아오기 시작했다. 집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코코넛을 던졌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을 투기 집단으로 몰아세웠고 집이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이 노력은 부족하면서 집 있는 사람만 질투하는 집단으로 단정했다. 코코넛을 던지면서 이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한 다주택자는 이렇게 말한다. “청약을 받았지만 입주 시기는 3년 뒤라 지금 집을 팔 수가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다주택자가 됐지만 그걸 투기로 모는 건 너무하죠. 집 있는 사람을 무조건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죠.”
무주택자의 얘기도 수긍이 간다. “대출이 어려워져 적어도 현금 2억원은 갖고 있어야 청약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분양이 안 되거나 계약이 안 된 집들이 나올 수밖에 없죠. 결국 다주택자들이 현금 다발 들고 가서 쇼핑하듯 집을 살 거라는 말들이 돌아요.” 이해할 법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예민한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서로에게 코코넛을 던지는 것도 위에서 떨어지는 코코넛에 대한 반응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속 코코넛이 “수당을 받으려는 10명 중 자격이 의심되는 한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 제도를 만들었더니 나머지 꼭 필요한 9명까지 못 받게 만들어버린 것”처럼 지금의 부동산 정책이라는 이름의 코코넛은 유주택자를 ‘죄인’, 무주택자를 ‘능력없이 조르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코코넛의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구할 수 있는 건 부동산 정책을 펼치는 정부뿐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부동산 정책 말이다. 모 아니면 도, 흑 아니면 백의 이분법적 논리로 정책을 내놓는다면 유주택자와 무주택자가 서로에게 코코넛을 던지는 강도도 세질 수밖에 없다. 덕분에 부동산 기사를 쓰는 기자도 때로는 유주택자, 때로는 무주택자들이 던지는 ‘댓글’이라는 이름의 코코넛 파편을 맞아야 하고.
서윤경 온라인뉴스부 차장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