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중 유일하게 ‘전후 독립 보장’ 이끌어낸 임정의 고군분투

입력 2019-04-16 04:02
미주 한인들이 1919년 4월 16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회의장인 리틀극장을 출발해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고 있는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이후 열강을 상대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나 주권을 상실한 약소국의 호소는 강대국 중심의 외교전장에서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의 외교적 도전은 광복의 날까지 중단되지 않았다. 국제외교 질서에서 잊혀지다시피 한 고국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초창기 외교 전사들의 투쟁은 눈물겨웠고, 그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1919년 파리에 꾸려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앞줄 왼쪽 끝이 여운홍, 오른쪽 끝은 김규식, 뒷줄 왼쪽 3번째가 조소앙.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상하이 임정’의 분투와 좌절

임시정부 초기 외교전략은 세계 열강에 일제의 폭압을 알리고 국제사회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것으로 이른바 ‘외교독립론’이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설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는 1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관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를 일제의 강압적 식민 통치와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릴 수 있는 무대로 판단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김규식은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대표로 임명돼 강화회의 참가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한국 대표단은 ‘정부 자격’이 아니라는 이유와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표단은 임시정부 대표 명의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파리강화회의가 소득 없이 끝나자 임시정부는 1921년 11월부터 개최된 워싱턴군축회의로 눈을 돌렸다. 이는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구미위원부가 전력을 기울인 최대 외교사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워싱턴회의에서도 한국 대표의 회의 출석 및 발언권 신청이 모두 묵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로 인해 워싱턴회의에 사활을 걸었던 신규식 내각은 외교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워싱턴군축회의 참가까지 무산되자 임시정부는 크게 낙담했다. 일련의 외교적 실패는 이승만의 대통령직 면직, 구미위원부 해체로 이어졌다. 이후 임시정부는 한동안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됐다.

중국 국민당이 일제 패망 후인 1945년 11월 4일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을 위한 송별연을 개최했다. 왼쪽부터 펑위샹, 김구, 장제스, 쑹메이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충칭 임정’의 도전과 성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 실패와 독립운동 세력 간 분열은 임시정부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1935년 김구가 임시정부에 복귀하면서 정부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충칭 시기 임시정부의 외교는 국제사회의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 광복군 활동 지원에 집중됐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등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중국은 ‘항일’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보다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충칭에 자리를 잡은 임시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광복군 창설 교섭에 돌입했다. 중국은 당초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 예하에 두고자 했으나 임시정부는 끈질긴 교섭 끝에 1941년 4월 광복군을 ‘임시정부의 군대’로 인준받았다. 이후 중국군사위가 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규범)’을 통보했을 때도 임시정부는 외무부장이었던 조소앙 등의 교섭으로 이를 물리고 새로운 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다.

다만 국제사회로부터의 임시정부 승인은 끝내 받아내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8일 미·일 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임시정부 승인 계기로 삼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는 다시 이승만의 주도로 진행됐다. 임시정부는 1941년 6월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면서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 사실상 주미 외교의 전권을 그에게 부여했다. 이승만의 전방위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끝까지 임시정부를 외면했다. 당시 미 국무부는 임시정부가 보낸 이승만에 대한 신임장조차 접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1945년 2월 국제연합(유엔) 창설과 2차 세계대전 전후 관리를 위한 ‘샌프란시스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는 한국의 독립 문제를 부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임시정부는 즉시 주미외교위원장이던 이승만에게 대표단을 구성할 것을 지시하고, ‘대독(對獨)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1941년 6월 4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작성된 이승만 주미외교위원장 임명장(왼쪽)과 미 국무부로 보낸 이승만 워싱턴전권대표 신임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임시정부는 회의 참가요청 공문과 한국독립운동·임시정부 소개 문건을 만들어 주요국 관계자에게 배포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1945년 6월 26일 종료된 샌프란시스코회의에도 임시정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미국은 회의 참석을 위해 주중 미국대사관에 비자 발급을 신청했던 조소앙과 김규식의 비자도 제때 발급해주지 않았고, 이승만을 비롯한 미국 내 한국 대표단 역시 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 공식 이유였지만 미국이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한국 대표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해석도 있다.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한 미국과 영국, 중국 정상. 왼쪽부터 장제스 중국 총통,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 총통 부인 쑹메이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대한 독립’ 인정받은 카이로회담

임시정부의 외교전은 도전과 좌절의 반복이었지만 성과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로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받은 카이로회담이 꼽힌다. 카이로회담은 1943년 11월 미국과 영국, 중국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한 회의다.

김구는 1943년 7월 카이로회담 개최 소식을 전해 듣고 즉시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을 찾아갔다. 김구는 그에게 당시 국제사회에서 거론되던 전후 한반도 신탁통치 논의에 대한 반대 의견과 일제 패망 시 한국의 즉시 독립을 카이로회담에서 관철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실제 카이로회담에서 임시정부의 요구를 전달하고 이를 승인하자고 제안했다. 중국 입장에서는 독립된 한국이 중국을 위협하는 침략 세력의 완충지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 승인 시 자국 식민지인 인도의 독립운동 고무가 우려됐던 영국이 반발했지만 일본군을 중국에 묶어두는 일이 시급했던 미국은 적당한 시기’라는 조건을 달아 이를 수용했다. 결국 그해 12월 1일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했다”는 내용이 포함된 카이로선언이 발표됐다.

비록 ‘적당한 시기’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카이로선언은 2차 세계대전 중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수많은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만 전후 독립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