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공소장 문제 있다”… 주요 재판 쟁점 된 ‘공소장일본주의’

입력 2019-04-14 19:55 수정 2019-04-14 22:59

공소장일본주의(一本主義)가 최근 법정에서 단골손님처럼 등장하고 있다. 다소 생소한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건 사법농단 의혹 사건의 피고인인 전직 법관들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 개념으로 검찰에 공세를 펼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의 재판부는 지난달 이례적으로 검찰에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반한 잘못이 있다며 공소장 변경을 요청했다. 검찰은 15일 양 전 대법원장의 두 번째 공판준비기일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공소장일본주의는 법관이 재판 전부터 피고인이 유죄라는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공소장에 범죄행위만 기재해야 한다는 형사재판의 원칙이다. 범죄행위와 관련 없는 사실을 적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 범죄 혐의와 범죄 주체인 피고인을 구분하고, 범죄 내용만을 놓고 유무죄를 가리자는 것이다.

공소장일본주의 문제는 그동안 크게 쟁점화되지 않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009년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대표의 상고심 판결에서 확립한 판례가 준용돼 왔기 때문이다. 당시 전원합의체는 “범죄 혐의를 특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설명은 불가피하다”는 검찰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 사건과 사법농단 의혹 사건처럼 사안이 복잡하고 다양한 쟁점을 가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공소장일본주의가 논란의 대상으로 다시 떠올랐다. 이런 사건의 특성상 피고인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평가를 받는지 등 배경상황과 범행 동기가 혐의사실을 설명하는 데 많이 포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항소심 재판에서 국선변호인이 공소장일본주의를 주장할 때만 해도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은 지난해 2월 “공소장에 ‘문고리 3인방’이라는 표현, 용처와 관련해 ‘차명폰’이나 ‘의상실’을 언급하며 부도덕한 면을 부각해 재판에 대한 예단을 기재했다”면서 공소장일본주의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혐의 사실 설명에 필요한 부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공소장일본주의는 이명박 전 대통령 1심 재판부가 지난해 10월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를 공소기각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영포빌딩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청와대 문건에 대통령기록물관리법 혐의를 적용해 이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범행 동기만 공소사실 절반에 이를 만큼 길게 기재돼 있다”며 “법관에게 막연하게 유죄를 의심하게 한다”고 했다.

사법농단 의혹 사건 재판들에서는 공소장일본주의가 아예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2월 보석을 청구하며 공소장일본주의 개념을 들고 나왔다. 임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도 공판준비단계에서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를 위배했다고 지적했다. 정봉주 전 의원과 이재명 경기지사도 재판에서 비슷한 취지의 주장을 했다.

피고인들의 잇단 공소장일본주의 위배 주장에 대해 법원 태도에 일부 변화가 감지되면서 검찰의 공소장 작성 관행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법원이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처럼 덩어리가 큰 사건을 겪으면서 방대한 공소사실이 담긴 검찰 공소장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는 것 같다. 검찰도 공소장 작성 관행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공소장일본주의라는 것 자체가 해석의 여지가 많아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검찰은 범죄 관련 범행 동기, 경위, 배경 등에 대한 언급 없이 범죄 혐의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현재 자신의 재판에서 공소장일본주의의 엄격한 적용을 주장하고 있는 양 전 대법원장 본인도 대법관이던 시절인 2009년엔 다른 입장이었다. 그는 당시 3000자에 이르는 보충의견에서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단순히 범죄행위만 기재하면 공소사실을 높게 특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의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재판부가 공소장 변경을 요청하자 내놓은 주장과 동일한 논리다. 검찰은 “다양한 공모관계에 기반해 은밀하고 조직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범죄가 이뤄져 전후 사정과 범행 동기, 경위를 자세히 말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