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서 임시정부 활동 재연하며 독립운동 의지를 되새기다

입력 2019-04-12 04:04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

100년 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내 김신부로(路) 어딘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포식이 열렸다. 이후 상하이는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거사를 앞둔 의열단 단원들이 정장 차림으로 거리를 걷고, 이봉창 윤봉길 최흥식 유상근 이덕주 유진만 등 수많은 한인애국단 투사들이 선서를 하고 죽음의 길을 떠났던 결의와 한, 피눈물이 상하이 거리와 골목마다 서려 있다. 윤봉길 의사는 ‘살아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대로 상하이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본군에 폭탄을 투척하고 조국에 목숨을 바쳤다.

임시정부 출범 100주년을 맞은 11일 상하이에서는 100년 전 그날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가는 행사가 열렸다. 여야 원내대표단을 포함한 국회의원들과 정부 인사, 독립유공자 후손 등 정부 대표단은 임시정부 청사와 융안(永安)백화점, 매헌기념관을 방문해 당시 임정 활동을 재연하면서 독립운동 의지를 되새겼다.

임시의정원 의원 29명은 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상하이 김신부로의 한 건물에서 첫 밤샘 회의를 열어 대한민국 국호를 정했다. 11일엔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당시 회의 장소가 임시정부의 첫 청사인 셈이다. 하지만 현재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신부로 22번지’라는 보도가 있지만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독립기념관 측은 밝혔다. 정부 대표단은 임시정부가 26년부터 32년까지 사용했던 마당루 청사 김구 선생 집무실에서 당시 임시헌장 선포 장면을 재연하고 내부를 둘러봤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21년 1월 1일 임정 출범 후 두 번째 신년축하연을 공공조계 융안백화점 식당에서 하고 옥상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은 당시 임정 인사 59명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 기념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선전물로 삼았다. 정부 대표단도 당시 자리에서 같은 포즈로 기념촬영을 했다. 앞서 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첫 번째 신년하례는 공공조계 내 일품향에서 열렸고, 일품향 옥상에서도 기념촬영을 했다. 그 사진도 현재 남아 있다.

대표단이 마지막으로 방문한 훙커우공원 내 매헌기념관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이다. 윤 의사는 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자 단상에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 수뇌부에 큰 타격을 입혔다. 당시 장제스 총통이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경의를 표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이날 서울 여의도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은 임시정부 수립 원년인 19년을 기리기 위해 오후 7시(19시) 19분에 시작됐다. 행사가 열린 여의도공원(옛 여의도비행장)은 74년 전인 45년 8월 18일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소속 4명이 C-47 수송기를 타고 해방 후 맨 먼저 한반도 땅을 밟았던 역사적 장소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 대표로 기념식에 참석해 대국민 기념사를 직접 발표했다. 이 총리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선현들의 염원과 희생 위에 서 있다”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뿌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가지를 키우며 꽃을 피웠다”고 말했다. 또 “고난을 딛고 우리는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 발전했다”며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우리는 더 좋은 조국을 만들기 위해 다시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상하이=노석철 특파원, 이상헌 기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