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팍팍하다는 민생의 불만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해 가계의 여윳돈이 2009년 통계 작성 이후 사상 최저 수준으로 줄었다. 반면 정부의 여윳돈은 세금이 잘 걷힌 데 힘입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가계의 금융자산 가치는 크게 감소했다.
한국은행은 10일 ‘2018년 자금순환’ 잠정치를 발표하고 지난해 가계와 비영리단체(소규모 개인사업자 포함)의 순자금운용(여유자금) 규모가 2017년(50조9000억원)보다 감소한 49조3000억원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각 경제주체가 주고받은 돈의 흐름을 망라하는 자금순환은 국가경제의 재무제표 성격을 지니는 통계다. 국내 가계가 예금·채권·증권 등으로 굴린 돈(자금운용)에서 금융권 대출금(자금조달)을 뺀 순자금운용이 50조원을 밑돌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부동산 시장이 위축되고 금융권의 대출 규제가 강화된 지난해에 가계가 빌린 돈이 늘어난 건 아니었다. 다만 씀씀이가 소득보다 커지면서 자금운용 규모가 더욱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 가계의 순자금운용 축소로 이어졌다. 한은 관계자는 “소비가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며 “연간 통계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저축의 증가분이 전년에 비해 덜 증가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소비의 증가를 긍정적으로만 보긴 어렵다. 지난해 말 기준 가계의 금융자산은 3729조7000억원으로 2017년 말보다 1.7% 늘었다. 그런데 금융부채는 1789조9000억원으로 같은 기간 6.1% 증가했다. 자산보다 부채가 크게 불어나며 금융부채 대비 금융자산 배율은 2.08배가 됐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말(1.97배) 이후 최저 수준이다. 한은 관계자는 “지난해 말 글로벌 증시가 전체적으로 하락했고, 떨어진 주가가 연말의 자산평가액 계산에 반영됐다”며 “올 들어 주가가 회복됐기 때문에 (금융부채 대비 금융자산) 배율도 다시 높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지갑 사정은 가계와 반대였다. 정부의 순자산운용은 지난해 55조원을 기록, 2017년(49조2000억원)보다 늘어났다. 가계의 순자산운용과 역전된 셈이다. 한은 관계자는 “세수가 호조를 보였고,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기금 수지가 흑자였다”고 설명했다.
비금융 법인기업(일반 기업)의 순자금조달(자금조달에서 자금운용을 뺀 수치)은 39조8000억원으로 조사됐다. 2017년에는 14조4000억원 수준이었다. 한은 관계자는 “통상 자금사정이 나쁘다고 할 때는 필요한 자금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한 경우”라며 “순자금조달 규모가 늘었다고 해서 단순히 자금사정 악화라 해석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