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대표하는 서정 시인 라이너 쿤체(86·사진)의 신작 시집이다. 노년에 이른 그가 쓴 시 43편이 수록됐다. 쿤체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증언한다. 그는 ‘점점 더 멀리/ 점점 더 빠르게 지구를 떠나간다/ 수천억 은하 속 수천조 태양들이’라며 혼돈과 폭력으로 가라앉고 있는 이 땅을 위해 시를 쓴다.
‘칠월인데/ 나무들이 잎을 떨구었다/ 수북한 초록 잎들을 철벅철벅 헤치며/ 우리는 여름을 밟았다’(‘종말의 징후’ 중) 기후 변화로 계절이 뒤죽박죽된 장면이다. ‘토막토막 난,/ 배신 당한,/ 배반 당한,/ 땅이,/ 나를 들어올려 카르파텐 산맥 등에 태웠다/ 하여 백일몽 속에서 들렸다’(‘우크라이나의 밤’ 중) 이념을 둘러싼 동구권의 2013년 분쟁을 고통스럽게 지켜본다.
그는 어느덧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다. ‘우리 나이/ 놀라움이 커지는 나이// 우리 나이/ 믿음에는 잡히지 않으며/ 태초에 있었던 말씀은 존중하는 나이’(‘우리 나이’ 중) 쿤체는 부조리가 지배하지만 사랑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시를 써왔다.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그의 시 ‘두 사람’ 서두다. 이번 시집에도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행 하나 위에 세계를 세운다”고 평한 것처럼 쿤체는 단문으로 구성된 짧은 시행 위에 자기 시와 삶의 세계를 경건하게 세운다. ‘인류는 이메일을 쓰고// 나는 말을 찾고 있다, 더는 모르겠다는 말, 없다는 것만 알 뿐’(‘나와 마주하는 시간’ 중)이 대표적이다. 단 5행으로 구성된 표제작은 시인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는 구동독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76년 동독 체제를 비판한 작품을 발표해 동독작가연맹에서 퇴출됐고 이듬해 서독으로 이주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상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수상했다. 과거 구동독 정보국은 그를 감시하며 ‘서정시’라는 제목으로 3500쪽 분량의 파일을 남겼다.
시인 나희덕은 지난해 쿤체의 삶을 소재로 한 ‘파일명 서정시’를 표제작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강주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