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벽돌’ 위수감옥, 서대문형무소 축소해 놓은 듯

입력 2019-04-11 04:03
서울 용산 미군기지 버스투어에 참여한 시민들이 지난 9일 기지 내 ‘캠프킴’에 만들어진 ‘용산 갤러리’를 둘러보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 빼곡하게 서 있는 서울 용산구의 빌딩숲을 지나던 버스가 높은 벽과 쇠창살 앞에 멈춰 섰다. 용산 미군기지 14번 게이트. 지난 9일 군인들은 외부와의 왕래를 쉽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3분가량의 출입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115년간 굳게 닫혀 있던 ‘금단의 땅’이 속살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기지 안으로 들어서고 고작 몇 초 지났을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확 틔였다. 나지막한 언덕과 평지가 펼쳐지고 곳곳에 살구색 건물들은 맵시를 뽐냈다. 병원, 학교, 호텔 등 일부 건물을 빼고는 대부분 3층 이하로 낮았다. 도로 이정표에는 영어가 가득하다. 마치 한적한 미국의 시골마을로 여행을 온 느낌이었다.

용산 미군기지에는 일제 강점기 때 왕벚나무가 심어졌다. 일본군 병기지창 건물 앞 도로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자태를 뽐낸다.

한미연합사령부 건물 뒤 ‘만초천’에는 연초록빛 새싹이 자라고 있었다. 만초천은 인왕산에서 시작해 한강으로 흘러가는 물길이다. 1960년대 서울시 개발을 진행하면서 복개됐지만, 미군기지 안에 자리 잡은 300m 구간은 원형 그대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만초천 주변 도로에는 일제가 심었던 왕벚나무가 줄지어 섰다. 활짝 핀 벚꽃잎이 바람을 타고 흔들리며 만초천으로 떨어졌다. 버스투어 안내를 맡은 김천수 용산문화원 용산문화실장은 “미군기지 내부는 한적한데, 주변에는 주상복합빌딩과 고층아파트가 즐비하다. 두 공간의 밀도가 달라 같은 서울인지 헷갈리고는 한다”고 말했다.

용산 미군기지가 터를 잡은 땅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강제수용한 이후 현재까지 ‘한국 땅’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주둔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의 생활터로 활용됐다. 1952년 한국 정부가 미군에 정식으로 공여한 뒤로 지금까지 주소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시작한다. 2005년부터 국가공원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버스투어를 시행하고 있다. 공원 개발을 시작하기 전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모습들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버스투어는 용산 미군기지 내 ‘캠프킴’에 마련된 용산갤러리에서 버스를 타고 기지 내 주요 거점을 둘러보는 식으로 이뤄진다. SP벙커(일본군 작전센터), 121병원(총독관저터), 위수감옥(일본군 감옥), 주한미군사령부, 한미합동군사업무단, 일본군 병기지창, 남단, 드래곤힐 호텔 등 역사·문화적 의미가 서려 있는 장소를 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 지난 9일까지 총 700여명(16회차)이 참여했다. 기지 안에 왕벚나무가 많아 이달부터 회당 버스 운행을 1대에서 2대로 늘렸다. 용산문화원 홈페이지에 접수하면 무작위로 참가자를 추첨한다.

일제가 감옥으로 사용했던 위수감옥은 긴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서 있다.

용산 미군기지에서 가장 독특한 공간은 ‘빨간 벽돌 집’ 위수감옥이다. 외양은 서대문형무소를 축소해 놓은 듯하다. 건물 곳곳에는 6·25전쟁 때 탄흔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엔 이곳에서 사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위수감옥은 빨간 벽돌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바깥과 달리 안쪽에선 검게 변한 시멘트벽만 볼 수 있다. 세월을 견디던 벽이 허물어지자 미군이 시멘트를 덧발라 고정했다. 시민 이모(30)씨는 “붉은 벽돌에서도 지난 100여년의 세월을 찾아볼 수 있어 신기하다”고 말했다.


용산 미군기지에는 1000여개의 건축물이 있다. 공원화 예정 부지(약 80만평·243만㎡)에는 975개가 서 있다. 위수감옥처럼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도 여러 개다. 지난해 11월 끝난 ‘용산공원 조성계획 기본설계 용역’에서는 975개 중 81개 존치, 53개 판단 유보, 나머지는 철거하라고 권고돼 있다. 권혁진 국토부 도시정책관은 “역사·문화적 가치, 지형과의 조화, 공원 운영관리상 필요성을 고려해 존폐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용산공원 조성을 위한 공론화 작업에 들어간다. 권 정책관은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시민 의견, 전문가 토론, 각종 설문조사 등 공론화 작업을 거쳐 올해 하반기 중 최종 조성계획을 확정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