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단어. 아프고 따뜻한 글자. ‘엄마’라고 발음하는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마음을 베고 지나가지만 힘들 때면 가장 먼저 내뱉는 낱말 엄마. 만약 엄마라는 단어를 잃어버린다면, 그 단어를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우리 삶에서 남는 건 뭐가 있을까.
5년 전 세월호 참사로 생때같은 딸 주아를 잃은 정유은씨는 그런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정씨는 사고 이후 한동안 친정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고 한다. 수화기 너머 친정엄마에게 “엄마”라고 말하는 순간 딸이 자신을 부르던 장면이 떠오를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1년쯤 지났을까. 엄마가 당뇨가 악화돼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이 왔고, 결국 그는 병원을 찾았다.
“나는 눈물이 안 날 줄 알았거든요. 내가 주아를 보내는 그 고통을 겪었는데, 그래서 엄마를 봐도 눈물이 안 날 것 같았는데, 엄마를 보니까 눈물이 났어요.”
그러면서 이어지는 이야기. “(참사가 벌어진 뒤부터는) 벽을 보고 눕지를 못해요. 주아가 그 배에 갇혀서 숨을 못 쉬었을 걸 생각하니까 벽이 내 앞에 있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요.”
정씨의 사연은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날이…’는 세월호 유가족 53명과 생존자 가족 4명의 육성이 담긴 책이다. “세월호 참사의 증거를 남기고 흩어지는 고통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는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 썼다. ‘금요일엔 돌아오렴’(2015) ‘다시 봄이 올 거예요’(2016)를 잇는 세 번째 작품. 책을 펼치면 책장 곳곳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스토리가 기다랗게 이어진다.
가령 지현이 엄마 전옥씨는 사고 이후 딸 사진을 볼 수 없었다. 딸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벌떡 일어나 TV를 켰다. “지현이가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게 너무 무서워요.”
딸이 지내던 방의 문도 닫아놓고 지냈다. 하지만 누군가가 건넨 말 한마디가 얼어있던 전씨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지현이가 제 침대에 앉아서 엄마 일하는 모습, 엄마 밥하는 모습 보고 싶어 하면 어떡하느냐.” 그때부터 그는 딸의 방문을 열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전씨 가족은 이사를 해야 했다. 꼭 이사를 가야 하는 걸까. 지현이의 손때가 묻은 집을 떠난다는 건 지현이를 버리는 일 아닐까. 지현이 언니들도 반대했다. “큰 집, 좋은 집,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지현이가 제주도 수학여행 간다고 인사하고 나갔던 그 문. 지현이가 잡았던 문고리. 그런 게 소중한 거예요. 이 집을 통째로 갖고 가면 좋겠어요.”
이렇듯 ‘그날이…’에는 유가족의 한숨과 절망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하지만 세월호 유족을 하나의 이미지로 상상해선 안 된다. 유족들의 마음속 우물엔 여전히 분노와 체념의 눈물이 찰랑거리고 있지만, 모두가 슬픔의 바닥을 긁고 있는 건 아니다. 희미한 희망의 기미를 느낄 수 있는 글도 드문드문 등장한다. 은정이 엄마 박정화씨의 사연이 그렇다. 딸이 떠난 뒤 그는 가족의 생일을 챙길 수 없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다가 박씨는 은정이 생일에 미역국을 끓였고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여보, 이거 미역국이야. 알지?” “응, 알아.” “당신 생일이나 내 생일은 따로 하지 말고 은정이 생일날 이렇게 미역국 한 그릇씩 먹자. 1년에 한 번씩만 이렇게 먹자.”
책은 독특한 구성을 띠고 있다. 필자들은 가장 먼저 유족이나 생존자 가족의 마음을 아리게 만든 단어를 하나씩 골라 그 사연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팽목’ ‘안산’ ‘단원고’ ‘동거차도’ 같은, “세월호의 지도가 그리는 공간들”이 이들에게 각각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들려준다. 그러면서 유족들이 아픔을 나누며 어떻게 하나의 유사가족으로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벌인 유족들의 “싸움의 빛깔”까지도 선명하게 드러낸다.
5년 전 그날 이후 유가족의 삶이 산산조각이 났을 건 불문가지다. 문제는 위로랍시고 사람들이 건넨 이런저런 말이 때론 비수처럼 유족들 가슴에 꽂히곤 했다는 점이다. “교통사고라 생각하고 자식을 가슴에 묻어라” “애들은 좋은 곳으로 갔을 거다”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유족들은 집을 사거나 차를 바꾸면 “애들 팔아서 한 재산 챙겼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사람들은 이들이 해외여행이라도 가면 “○○○은 보상금 받아서 해외여행 다닌대”라고 쑥덕거렸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어떤 이들은 교회에 크게 실망했다. 시찬이 아빠 박요섭씨는 “참사 전에는 교회가 삶의 중심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마음이 상했던 건 교회 안에서 세월호 얘기를 안 한다는 거예요. …(교회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오히려 나는 길에서 예수님을 봤고 길바닥에서 진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신앙인이고 기독교인이라는 생각, 이제 나는 안 한다.’”
책을 읽으면 희생자 가족이 살아있다는 이유로 마주한, 생존자 가족이 살아남은 탓에 겪은 먹먹한 아픔을 어렴풋하게나마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행간 사이에서 서성이다 보면 결국 깨닫게 되는 건 우리는 저들의 가없는 슬픔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유족들은 당부한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고, 참사의 진상이 완벽하게 드러날 때까지 함께해 달라고 말이다.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우리 아이들 약전(略傳)을 전국에 있는 모든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는 거야. …나는 세월호에 대한 기록이나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 나는 죽으면 없어지지만 책이나 기록은 안 없어지니까.”(찬호 아빠 전명선씨)
“지금이 더 힘들어요. 굉장히 서운하고. 정권이 바뀌니 국민들의 관심도 줄어들고 마치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처럼 수수방관하는 분위기로 바뀐 것 같아서. …국민들과 우리 유가족이 같이 싸우지 않으면 그냥 마무리되는 거잖아요. 예전에 연대했던 그 많은 국민들을 어떻게 다시 끌어올릴까. 어떻게 함께할까. 이게 숙제죠.“(세희 아빠 임종호씨)
“큰 행복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호연이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정말 편하게 웃고, 호연이는 없지만 호연이가 항상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끼고 살고 싶어요. 새롭게 행복하고 싶어요.”(호연이 엄마 유희순씨)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