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법관들의 ‘변론 전쟁’… 깊어가는 재판부 고민

입력 2019-04-13 04:01

엘리트 법관들의 ‘변론 전쟁’이 시작됐다. 등장하는 ‘선수’들은 사법농단 의혹 사건으로 대거 재판에 넘겨진 전·현직 법관이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변론 전쟁 시리즈 첫 회에서 존재감을 알렸다. 지난달 가장 먼저 재판을 시작한 그는 법정에서 적극적으로 ‘셀프 변론’에 나서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 박병대 전 대법관 재판은 이르면 5월 초쯤 본격 심리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전직 사법부 수장이었던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 대법관이 임 전 차장처럼 자기변호를 통해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일지 주목된다.

일반인 피고인은 변호인에게 변론을 대부분 위임한다. 통상적으로 피고인이 직접 입을 여는 건 재판이 시작할 때 모두진술이나 끝날 무렵 최후진술을 할 때다. 가끔 증인신문 도중 몇 개의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법농단 의혹 재판은 피고인들이 법률 전문가인 만큼 일반적인 재판과 확연히 다르게 전개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법조계에서는 임 전 차장이 재판에 임하는 태도를 두고 변호인보다 더 변호인 같다는 평이 나온다. 공판 때마다 법리를 들어 검찰의 공소사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거나 검찰 측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장면이 자주 연출된다. 임 전 차장이 재판을 진행하려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자 검찰이 재판부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런 모습이 가장 두드러진 때는 지난 2일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에 대한 증인신문에서다. 임 전 차장은 검찰이 정 판사를 상대로 증인신문을 이어가던 도중 계속해서 “유도신문에 해당한다” “100항 질문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등 언급을 하며 제동을 걸었다. 이에 검찰 측은 “소송 지휘는 재판장님이 하는 것”이라며 “검찰의 신문이 잘못되면 재판장이 제지할 수 있는데 피고인이 신문 사항에 제동을 건다면 이게 과연 누구의 소송인지 조금 혼란스럽다”고 난색을 표했다.

임 전 차장은 같은 날 증인신문에 앞서 “적극 소송 지휘를 해 달라”며 재판부를 향해 당부를 하기도 했다. 그는 형사소송법 규칙 조항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증인신문에서 금지하고 있는 질문의 유형을 설명했다. 이어 “형사소송법 74조 및 75조에 어긋나는 증인신문이 이뤄질 경우 피고인(임 전 차장)측은 적극 이의를 제기할 예정이다”며 “재판장님께서도 전향적으로 소송지휘권을 행사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핵심 증거인 임 전 차장의 이동식저장장치(USB)의 증거능력을 놓고 공방을 벌이던 지난달 26일 공판에서도 임 전 차장의 ‘셀프 변론’이 두각을 나타냈다. 임 전 차장은 “위법 수집 증거에 대한 일반론과 이 사건 쟁점에 대해 간단히 본다”며 말문을 열었다. 마치 변호인이 된 듯 프레젠테이션(PPT) 화면을 법정 내 스크린에 띄워놓고 USB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영장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우리 헌법 12조3항이 선언하고 있는 영장주의에 위반해 수집된 증거는 절차적 하자가 중대해 이를 구체화한 형사소송법 308조의2에 따라 증거능력이 배제된다”며 2시간 가까이 변론을 이어갔다.

법률 전문가들을 심리해야 하는 재판부의 고민도 깊다. 선배 법관이자 법관 중에서도 엘리트 법관으로 꼽히는 사법농단 의혹 관련 피고인들의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임 전 차장 재판을 맡은 윤종섭 부장판사는 사법연수원 26기로 임 전 차장과는 10기수 차이다. 2일 정 판사 증인신문 과정에서 임 전 차장이 계속해서 검찰 신문을 문제 삼자 윤 부장판사는 “신문 사항이 부적절하다 이런 말은 가급적 하지 마시라”며 “증인 의견을 듣고 이의를 제기하라”고 제지하기도 했다.

향후 이어질 양 전 대법원장과 박·고 전 대법관의 재판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을 맡은 박남천 부장판사는 윤 부장판사와 같은 26기다. 양 전 대법원장과는 무려 24기수 차이다. 전직 사법부 수장이자 24년 선배인 법관을 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도 지난 2월 보석 심문 기일에서 13분간 검찰의 잘못된 수사 관행을 반박했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공소장을 만들었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보석 청구서에는 다소 생소한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意)’를 언급하며 검찰의 공소장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담았다. 양 전 대법원장의 정식 재판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지난달 25일 첫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한 뒤 오는 15일 두 번째 공판준비기일을 연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직접 출석해야 하는 공판기일은 5월쯤에나 열릴 것으로 보인다.


영장 재판 개입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신광렬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성창호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 조의연 서울북부지법 수석부장판사에 대한 첫 공판준비기일도 다음달 15일 열린다. 신 부장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판사를 지냈다. 조·성 부장판사도 국정농단 사건과 김경수 경남지사의 댓글조작 사건 등 굵직한 형사사건들을 맡아왔다. 이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 재판장 김미리 부장판사는 27기로 신 부장판사와 7기수 차이다.

▒ 법 전문가들의 남다른 법 지식 활용… 30시간 조서 열람부터 증인신청까지

사법농단 의혹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법률전문가인 피고인과 증인들의 남다른 법 지식 활용으로 색다른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다.

지난 2일 현직 법관으로서 처음으로 증인으로 출석한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는 법정 내 구속 피고인 대기실에서 나와 증인석에 섰다. 통상 증인들은 법정 방청석이나 법정 밖 복도 의자에서 대기하다 재판부가 소환하면 증인석으로 나온다.

정 판사가 방청석이나 복도가 아닌 별도의 대기실에서 대기하다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증인 신청 지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규칙에 따르면 증인이 증인 지원을 요청할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대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재판 진행 절차에 전문가인 현직 법관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제도를 십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검찰 수사 단계에서도 법률전문가인 피의자들의 법 활용이 눈길을 끌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1월 28시간 검찰 조사를 받은 뒤 조서 열람에 30시간을 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5시간 조사에 6시간, 박근혜 전 대통령이 14시간 조사에 7시간30분을 조서를 검토한 것에 비하면 이례적으로 장시간 조서를 열람한 것이다. 조사를 마친 뒤 곧바로 이어서 조서 열람을 30시간 동안 한 것이 아니고, 일단 귀가했다가 다시 조서 열람만을 위해 이틀을 할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일반적인 피고인이라면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경우 변호인 전원 사임, 증거 동의를 전면 반복했다. 검찰은 “의도적인 재판 지연 전략”이라며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달 13일 구속 기간이 만료되는 임 전 차장이 의도적으로 재판 진행을 더디게 해 불구속 상태에서 구속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충분히 다투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