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한국이 조속히 ILO 핵심 협약을 비준하지 않으면 ‘통상 보복’에 나설 수 있다고 압박했다. 국제무역기구(WTO)나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시사했다.
한국 정부는 곤란한 처지가 됐다. 한국은 8개의 ILO 핵심 협약 중 단결권을 포함한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퇴직자도 노동조합 가입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부분을 문제 삼아 경영계가 강력하게 반발해서다. 비준할 내용을 심의하고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할 국회가 전향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낮다. 한국의 대(對)EU 수출길에 ‘ILO 핵심 협약 장벽’이 떠오른 것이다. 한국과 EU의 통상관계에 먹구름이 드리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진다.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9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ILO 핵심 협약 비준’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이날 한국과 EU는 제8차 FTA 무역위원회를 가졌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을 면담하기도 했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ILO와 EU는 한국이 핵심 협약 비준을 하지 않은 점, 한국의 노동법이 ILO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려한다”며 “한국이 조속히 행동을 취해야 할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EU FTA 협정문에 명시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한다’는 약속을 언급한 것이다.
다만 당초 예상됐던 ‘통상 제재’ 선언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EU는 분쟁 해결 절차에 따라 전문가 그룹을 구성해 한국이 FTA 협정을 위반했는지 살펴보겠다고 엄포를 놨었다. 그렇다고 우호적 분위기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이 장관과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과 만나 어느 정도 정보를 얻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와 면담까지 한 뒤에 제재 조치를 취할 데드라인을 고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재 수단으로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도 했다. 그는 “WTO를 통한 방법도 있고 한·EU FTA 내에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며 사실상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이 강력 카드를 꺼냈지만, 한국 정부가 실타래를 풀기는 쉽지 않다. ILO의 여러 협약 가운데 핵심 협약은 8개다. 한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은 핵심 협약은 딱 절반인 4개다. 특히 걸림돌이 많은 것은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협약’이다. 이 협약을 비준하면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해고자의 노조 활동, 노조 전임자의 임금 지급이 가능해진다. 경영계 입장에서는 눈엣가시다. 이렇다보니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사회적 대화 단계에서부터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경사노위는 아무런 합의도 없이 국회로 공을 넘겼다.
국회의 역할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문재인 대통령의 2기 내각 임명 강행에 정국은 급랭했다. ILO 핵심 협약 비준을 놓고 야당과 협의조차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결국 EU가 ‘통상 보복’을 취하는 수순으로 갈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분쟁 해결 단계로 가면 (한국은) 평판에 큰 손상을 입는다”며 “그 전에 해결하려는 것이다. 국회와 기업, 노조가 책임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