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연걸이다’하고 중국어로 말해주면 중국인 관광객들이 크게 웃으며 사진도 찍어 갔어요. 그 정도로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서울 남대문시장 한복판에서 ‘황비홍 해물꼬치’라는 이름의 포장마차를 20년째 운영하고 있는 이모씨는 지난 7일 빈 테이블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없는 화창한 날씨였지만 손님은 없었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끊긴 중국인 손님의 발길은 좀체 살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100년을 목표로 한다는 ‘70년 노포(老鋪)’도 사정은 비슷했다. 자신의 나이보다 많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하양숙(65·여)씨는 식당 안을 둘러보며 “예전 같으면 골목 밖까지 줄을 설 시간인데 보다시피 곳곳이 비어있다”고 했다. 맵지 않은 설렁탕과 꼬리곰탕에 열광하며 매출의 20%를 책임져 주었던 중국인 손님은 사라졌다. 하씨는 “옆에서 3대째 영업하던 갈비탕 가게는 지난해 폐업했다”며 “주변 상인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남대문시장은 ‘글로벌 명품시장’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활기가 잃고 있다. 액세서리와 숙녀복, 건강식품을 파는 상인들은 중국인 고객의 감소를 호소했다. 40년 넘게 여성의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50대 여사장 A씨는 “이상하게 지난해 11월쯤부터 중국인 고객이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전했다. 코트와 재킷을 한 번에 5벌씩 사가던 중국인들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힘들어졌다’는 상인들의 체감에는 이유가 있다. 상인회장 격인 박영철 남대문시장주식회사 대표는 “깃발 관광(가이드가 깃발을 들고 관광객을 통솔하는 단체관광)이 유행했다가 사드 사태 당시 중국 당국이 단체관광 규제를 시작했다. 이후에는 ‘보따리 장사’에게도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규제 속에서도 아동복, 액세서리 등 우수한 한국산 제품을 포기하지 않던 중국 소매상들은 올해 초부터 발길이 뜸해졌다. 30년 넘게 이불 가게를 운영하는 민모(50·여)씨는 “중국인 상인들이 새벽에 대량으로 물건을 떼가는 때에는 자정에 문을 열기도 했다. 지금은 오전 7시나 돼야 가게 셔터를 올린다”고 말했다.
예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중국의 경제 성장세도 남대문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4분기 이후 중국 경제성장률이 6%대를 밑돌 수 있다는 관측이 많아졌고, 이는 중국 경제의 ‘경착륙(경기 급랭)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이 예전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데다 한국에서 쓰는 돈도 줄었다. 8일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중국인 관광객 1인당 지출 경비는 2017년 2147.9달러에서 지난해 1909.3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관광특구’로서의 강점이 무색해진 데다 국내 경기마저 부진에 빠져들자 지난달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상가 건물 하나가 통째로 폐업한 사건도 일어났다. 공실이 많아지니 건물주가 차라리 ‘문 닫기’를 선택한 것이다. 테이크아웃 커피숍과 환전소를 운영 중인 박칠복(66)씨는 “유행과 세태가 바뀌는데 젊은 직원은 없다. 남대문시장은 시장 자체가 고령화하고 있다”고 했다. 박영철 대표는 “지난해 500개 점포가 사라졌다. 올해는 연말까지 700~800개 점포가 폐업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남대문시장의 전체 점포 수는 1만2000개였다. 지난해부터 올 연말까지 약 10%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