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제2, 제3의 최재형을 찾자

입력 2019-04-09 00:03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대강당에서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민석 의원의 주도로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 출범식’이 열렸다. 최재형이 누구인가.

그는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고향에 대흉년과 기근이 휩쓸어 많은 사람이 굶어 죽자, 아버지와 형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인 ‘지신허’라는 한인 마을로 가게 됐다. 거기서도 가난과 배고픔이 계속돼 그는 11살에 포시트 항구로 갔는데 너무 배가 고파 기절하고 만다. 그때 한 무역선의 선장 부부가 쓰러져 있는 최재형을 구해 양아들로 삼았다.

선장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특별히 선장의 부인은 인텔리겐치아였다. 양아들에게 러시아어는 물론 러시아 고전문학과 인문학 등을 가르쳤다. 최재형은 17세 때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청년이 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다.

최재형은 러시아의 도로 공사를 따내 고려인들에게 돈을 벌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군에 고려인들의 농산품을 군납하도록 도와주며 거부가 됐다. 동네마다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학교를 세우면 민족 계몽운동이 일어나고 교회를 세우면 애국애민 사상을 가질 수 있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최재형에게 ‘페치카’(러시아어로 벽난로라는 뜻)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최재형은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의회를 조직했는데 그때 안중근 의사가 동의회 평의원이었다. 최재형은 동의회 총재로서 안중근 의사가 의용군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해줬다. 독립군들에게 무기도 공급해줬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자신의 저택에 머물게 하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사격 연습도 시켰다고 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투옥된 후에도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끝까지 보살펴줬다.

이후에도 권업회를 창립해 한인의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는 일을 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 임시정부도 세웠다. 나중에 상하이에 세운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 1920년 일본군에 의한 ‘4월 참변’으로 총살을 당해 순국하게 된다. 얼마나 잔인하고 무참하게 죽였으면 가족들에게 시신을 인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가 ‘페치카 최재형’(선인출판사)이라는 책을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최재형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학인한 것이다.

나도 몇 년 전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최재형에 관해 알게 됐다. 그 후로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도 최재형에 대해 연구하게 됐다. 그분의 삶을 연구하고 알아갈수록 너무 감동됐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 국내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 의원에게 이야기했더니 주도적으로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 출범식’ 자리를 마련해줬다. 이혜훈 성일종 의원도 예산 편성을 도와줘 오는 8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최재형 추모비를 건립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시대에는 왜 최재형 같은 사람이 없을까. 왜 자신의 부와 명성을 고통당하는 백성들과 함께 나누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는 리더십이 사라졌을까. 그러니 한국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비판과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제2, 제3의 최재형이 역사의 흙무더기 속에 묻혀 있을 것이다. 당시 일제에 잡혀간 독립투사들이 독립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대주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한국교회가 찾아서 드러내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사상을 계승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처럼 민족 사랑과 섬김의 초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