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지고 잎이 떨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기온이 너무 떨어지면 나뭇잎이 더 이상 영양분을 만드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무가 가진 수분을 빼앗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가 살기 위해,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 자기의 잎을 스스로 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단풍도 낙엽도 나무의 몸치장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요, 나무의 치열한 생존 싸움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사명을 맡기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영광스러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제자들에게 필요한 결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버림’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0절)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곧바로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절)는 말씀처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자신의 중요한 것, 소중한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어부에게 있어 배와 그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고기잡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기호나 취미가 아닙니다. 고기잡이는 목숨과 연결된 생계 수단이며, 갈릴리 바다는 삶의 터전입니다. 무엇보다 부모와 가족은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 소중한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자기부인과 자기포기, 자기버림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어떻습니까. 버리려고 하지 않고 자꾸 움켜쥐려고 합니다. 자꾸 포장하고 겉을 꾸미고 위장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인사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왜일까요. 살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데, 버려야 할 때 버리지 않고 움켜쥐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데 그것을 제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뼈를 깎는 자기성찰과 반성, 자기부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거짓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영적인 비둔함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사도 바울은 이 말씀처럼 철저한 자기부인, 자기포기, 자기버림을 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또 내가 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심플하게 해야 합니다. 삶이 힘들고 문제가 복잡할수록 기본으로,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나는 무엇을 버렸는지, 또 현재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말입니다. 또 이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없는지, 그것이 물질인지 건강인지 명예인지 인기인지 자존심인지 내 아집인지 말입니다.
나무는 살기 위해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 자기의 잎을 스스로 버립니다. 버리지 않고 계속 갖고 있으면 나무는 끝내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버려야 할 때 버리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망합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으면 나중엔 피눈물을 흘립니다. 인생의 여러 고난 앞에서 내가 살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할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김영도 목사(부평중앙교회)
◇부평중앙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으로 김영도 목사는 2017년 부임했습니다. 가정을 세우는 교회,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교회, 제자와 리더를 세우는 교회, 말씀으로 무장하는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