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소설가 이전에 산문가인 작가 김훈(71·사진)이 신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에서 한 얘기이다. ‘라면을 끓이며’ 이후 3년여 만에 묶은 산문집이다. 노년에 이른 그가 집 앞 공원과 학교 운동장 등 여기저기를 어슬렁 걸어 다니며 듣고 들여다본 것들이 주로 담겨 있다.
어느 날 그는 공원에서 할머니들의 얘기를 엿듣는다. 작가는 “그들은 생애 전체와 눈에 보이는 것 모두를 수다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놀라운 언어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감탄한다. 대장내시경 검사와 골다공증에 대한 대처, ‘요샛것들’(며느리)에 대한 성토에서 시작해 아들 흉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얘기들이다.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할머니들의 모습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밥상을 청량하게 하는 먹거리 이야기도 있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여름엔 ‘오이지를 먹으며’란 글을 썼다. 그는 새콤하고 아삭아삭한 오이지를 먹으며 “시간과 더불어 새로워지는 삶을 생각한다. 오이지를 먹을 때, 나는 다가오는 시간과 지나간 시간이 생명 속에서 이어지는 경이를 생각한다”고 한다.
‘공차기의 행복’은 놀기 좋아하는 그의 천진한 품성이 배인 글이다. 작가는 “나는 개와 똑같이 땅을 딛고 달리는 운명에 행복했고, 직립보행하지 않는 개의 네 다리와 그 발바닥의 굳은살을 부러워했다”면서 “공은 인간의 육체의 일부이며 육체와 육체 사이의 또 다른 몸이고, 그 연결자”라고 한다. 공차기 구경도 즐긴다. 공을 차는 아이들을 “땅속에서 솟아오른 풀싹처럼 어여쁘”게 본다.
작가는 연필을 손에 쥐고 원고지에 글자를 눌러 쓴다. 육필로 글을 쓰는 몇 남지 않은 작가다. 서두에서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고 했다. 작가는 특유의 단순하고 기교 없는 문장으로 일상의 기쁨과 경이를 아무렇지 않게 스륵 걷어 올린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