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가 마이너스인 채권이 세계적으로 10조 달러를 넘었다. 우리는 점점 디플레이션에 처하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채권시장의 최근 동향을 전하며 “투자자와 정책입안자들이 올해 중 예상보다 빠른 세계 경제의 둔화를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고 해석했다. 물가와 경제성장률의 정체 속에서 ‘마이너스 금리 채권’이 늘어나는 현상을 주목한 판단이다. ‘마이너스 금리’란 금융기관이 이자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받는 개념이다. 갖은 경기부양 정책에도 투자가 좀체 늘지 않을 때 은행에만 머무는 유동성을 시장으로 흘러가게끔 유도하는 고육책이다.
4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5조7000억 달러 수준이던 마이너스 금리 채권은 5개월간 꾸준히 확대돼 지난달 말 10조 달러를 넘어섰다. 엉뚱하게 보이는 ‘마이너스 금리’지만 이런 채권이 전체 채권시장에서 20%를 차지한다.
국제금융센터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인상 사이클을 중단하고 유럽중앙은행(ECB)이 경기 전망을 크게 낮추면서 채권시장에서 비관적 인식이 확산됐다”고 배경을 풀이했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이 급증한 시기는 세계 곳곳에서 ‘R(Recession·불황)의 공포’가 퍼진 시기와 같다. 올 초 세계은행(WB)이 글로벌 경기를 ‘먹구름’으로 묘사한 가운데 각국 중앙은행은 돈 풀기에 골몰했고, 세계 경제를 이끄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내려잡혔다.
만기를 버티면 수수료를 오히려 토하는 마이너스 금리 채권에 관심이 쏠린다는 것은 경기 상황에의 불신을 시사한다는 해석이 많다. 채권 자체는 경제 비관론이 클 때 각광받는 안전자산이다. 여기에 디플레이션(상품·서비스 가격이 하락하고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현상) 국면이라면 마이너스 금리 채권에도 투자 가치가 생긴다.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 금리보다 큰 폭으로 하락한다면 실질적으로 ‘플러스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에 대한 투자는 만기 이전에 채권 금리가 더욱 떨어질 것(채권 가격 상승)이라 판단한 결정이기도 하다. 시장은 경기부양에 골몰하는 각국 중앙은행이 당분간 기준금리를 올리기 어렵다고 본다. 시간이 지나 마이너스 금리 폭이 확대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면 채권의 이자율은 마이너스지만 되파는 과정에서 차익이 발생하게 된다.
유럽 시장에서는 국채뿐 아니라 마이너스 금리 회사채도 인기다. ECB 예금 금리가 -0.4%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2년 만기, -0.0017%의 발행금리로 발행한 회사채가 대표적이다. 발행액은 3억 유로였지만, 9배에 가까운 26억 유로의 주문이 몰렸다.
유럽에서 확산된 마이너스 금리 채권은 미국으로의 채권자금 유입, 글로벌 장기금리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물가 상승을 무릅쓰고 오래 보유하는 장기 채권은 단기 채권보다 금리가 높게 책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독일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2016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에 진입했고, 미국에서는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3개월물 금리보다 낮아졌다.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가 가까운 미래의 경기 악화로 굳어진 결과다. ‘버블’ 이후 한동안 진통을 겪은 일본 경제의 모습이 세계적으로 재현된다는 해석마저 나온다.
꼭 경기침체의 전조로만 파악할 수 없다는 신중론도 만만찮다. 장단기 금리의 역전 현상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국내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단기간에 경기침체로 진입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미국 국채의 장단기 스프레드(차이)가 축소되더라도 경기 둔화에 이르기까지 시차가 존재한다는 분석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1일 “국제결제은행(BIS) 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향후 글로벌 경기상황을 논의했다”며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아직은 과도한 게 아니냐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