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칠한 얼굴과 불그스름한 눈매, 손끝의 떨림과 역동적 움직임, 금장을 수놓은 색색의 의상….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중국 경극이다. 하지만 배우의 입에서는 절절한 우리 판소리가 흘러나왔다.
3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창극 ‘패왕별희’ 시연 현장은 이처럼 매혹적인 공기와 신선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통의 현대화를 위해 달려온 국립창극단이 선보이는 또 하나의 실험작으로 5일부터 14일까지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극은 홍콩 배우 장국영 주연의 동명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제목처럼 초패왕 항우와 연인 우희의 이별을 담은 극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초한전쟁, 항우와 유방의 대립 등이 폭넓게 그려진다.
제작진이 화려하다. 경극의 대가로 불리는 대만당대전기극장 대표 우싱궈(66)가 연출을 맡았다. ‘템페스트’ ‘고도를 기다리며’ 등 서양 고전과 경극을 접목한 무대로 해외 평단과 관객에게 두루 박수를 받았었다. 다재다능한 소리꾼 이자람(40)이 작창·음악감독으로 나서 우리 소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정수를 내보인다.
상이한 성격을 가진 예술 간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경극은 시각적이고 구체적이다. 배우의 걸음걸이 등 몸짓 하나하나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창극은 소리꾼의 창과 아니리, 국악기들의 합주가 어우러진 청각 중심의 예술이다.
우싱궈는 지난달 제작발표회에서 “판소리에는 한민족 특유의 용감함과 생명력이 담겨 있고, 경극에는 손짓과 표정 같은 여러 퍼포먼스 요소가 내재해 있다. 판소리의 청각적 감동이 경극을 거쳐 외적으로 표현되길 바란다”고 했다.
우리 소리의 매력을 깊게 담아낸 작창이 감흥을 돋운다. 이자람은 하이라이트 시연 후 기자간담회에서 “록 블루스 힙합 등 그간 겪었던 모든 음색을 바탕으로 작창을 하는 편인데, 이번엔 내 안의 전통적 소스들을 넣으려 했다”며 “적벽가 춘향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을 참고해 전통적 음색을 잘 살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현재와 공명하고 있는 주제의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중국에서 여전히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항우의 모습은 올바른 삶의 방식을 고민하게 한다. 우싱궈는 “패한 사람은 그저 패장으로 남기 마련이지만, 항우만큼은 달랐다”며 “그가 가진 강직함과 정직함, 가슴속에 품은 따뜻한 사랑을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출연진으로는 정보권(항우 역) 허종열(범증 역) 윤석안(유방 역) 유태평양(장량 역) 등이 캐스팅됐다. 특히 여성 배역을 남자 배우가 맡는 경극 전통에 맞춰 창극단 간판 배우 김준수가 우희 역을 소화해 눈길을 끈다. 영화 ‘와호장룡’으로 아카데미 미술상을 받은 아트 디렉터 예진텐이 재해석한 전통 경극 의상도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다만 이따금 경극적 요소만 두드러지거나 배우들의 몸짓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우싱궈는 “방대한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두 장르를 단시간에 결합하는 건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극의 스타일과 색채 등의 요소를 빌려 전통성을 얼마간 보여드리는 작업”이라고 했다.
강경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