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들었는지, 꼭 봐야 할 영화라는 아내의 말에 ‘그린 북’을 봤다. 본래 그린 북은 영어책 ‘The Negro Motorist Green-Book’으로 ‘흑인 운전자를 위한 여행 안내서’였다. 흑인을 블랙이 아닌 ‘니그로’로, 운전자를 드라이버가 아닌 ‘모토리스트’로 표기하고 있는데, 뭔가 낯선 옛말이다. 책 커버가 그린 색이고, 책의 발행인도 그린(Victor H Green)이어서 그린 북이었을 게다. 그린 북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할 때 미국 여행국의 협조로 1936년부터 1967년까지 발행되어 사용됐다. 책 커버 목차는 여행 중인 흑인을 위한 호텔, 선술집, 자동차 정비업체, 나이트클럽, 식당, 휴게소, 자동차, 이발소, 미용원 등을 안내한다고 말한다. 그린 북은 인종차별의 슬픈 역사를 보여준다. 1863년 1월 1일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하고, 그 후 100년이 지나 백인과 흑인을 분리 차별하는 악법 짐 크로법이 1965년 효력을 잃었지만, 1960년대 미국의 남부는 노골적으로 흑인을 차별하는 땅이었다.
영화 ‘그린 북’은 천재적 작곡가이며 클래식 피아니스트 흑인 셜리(Donald Walbridge Shirley, 1927~2013)가 1960년대 이 차별의 땅으로 보디가드 겸 운전사 백인 토니와 함께 연주 여행을 하는 이야기이다. 셜리는 들뜬 크리스마스 시즌에 자신의 화려한 연주회를 통해 남부의 인종차별에 맞닥뜨린다. 셜리가 뉴욕의 나이트클럽 경비원 출신으로 조금은 거친 이탈리아계 토니를 높은 임금으로 고용해 함께 연주 여행을 떠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인종차별에 백인 토니가 개입하여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셜리의 멋진 연주가 백인들 앞에서 펼쳐지지만, 그는 일상의 인종차별에 맞서 힘든 삶을 감내해야만 했다. 연주홀에서 제공되는 품위 있는 식사에 백인들과 동참할 수 없으며, 백인들과 같은 화장실도 쓸 수 없고, 연주자에게 제공되는 VIP 대기실도 제공되지 않고 대신 허드레 물건을 들여놓는 창고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렇다고 연주회에 집중해야 하는 셜리가 인종차별에 맞서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투쟁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백인사회를 향해 셜리는 무언의 저항을 하는 조용한 피아니스트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인도의 간디가 떠오른다. 부조리한 사회를 향해 마음은 상처와 어두움으로 가득하지만, 얼굴은 미소를 지어야 하는 슬픈 광대가 셜리였다. 그렇다고 당시 남부의 백인 크리스천들이 자기 비판적으로 셜리의 음악회에 참석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단지 음악을 즐길 뿐 셜리와는 전혀 교제가 없다. 과연 그들에게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그러는 중 영화 ‘그린 북’은 우울한 역사를 보여주며 오늘의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자’가 셜리에게서 그려진다. 세상의 도전에 맞서 지혜를 다한 응전으로 새로운 역사를 갈망하는 그런 인물 말이다. 링컨 대통령이나 마틴 루서 킹 목사처럼 사회악에 목숨을 걸고 역동적으로 행동해 보란듯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지는 않지만, 셜리는 확실히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거스르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최소한 악을 악이라 부를 줄 아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여전히 우리 시대 기생하는 인종차별 같은 악한 제도에 저항할 것을 요청한다. ‘그린 북’은 시종일관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인종차별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세상에는 무모한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얼마나 많은 몹쓸 일이 벌어지는지, 잘못된 제도에 안주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꼴불견인지, 인종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슴 절절하게 보여준다. 그런데도 다행히 영화가 무겁지만은 않은데, 셜리의 아름다운 연주가 울려퍼지고, 백인 토니와 셜리의 인간적 만남과 유쾌한 대화가 들리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분단의 땅 한반도에는 어떤 몹쓸 악이 서로를 괴롭히고 있을지, 미세먼지 가득한 뿌연 4월의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젖는다.
주도홍 백석대 전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