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진우] 역사청산의 역사실종

입력 2019-04-04 04:02 수정 2019-04-04 18:31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건 현재의 문제와 모순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 개척 위해서다
우리 사회는 통합은커녕 빨갱이와 친일파로 분열돼 대립하고 있어…
성찰을 통해 ‘역사화해’로 나아가야


“당신은 붉은 깃발을 보면 무엇이 연상됩니까? 붉은 깃발은 당신의 정치적 신념과 일치합니까? 붉은 깃발이 꺼려진다면 왜 그렇습니까?” 요즘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역사전쟁의 색깔 논쟁을 지켜보면 얼마 전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서 보았던 전시장의 문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붉은색은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정당과 같은 진보적 이념을 상징하고 또 검은색은 보수주의 정당을 대변하는 정치적 상징의 적절성에 관해 묻는 질문이었다.

독일을 왕국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독일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에서 제기된 이 질문은 결코 도발적이지 않았다. 혁명 과정의 온갖 분열과 갈등, 결함과 성과를 담담하게 성찰하는 공간에서 정치적 색깔은 적대적 대립과 행동의 적나라한 공격성을 상실한다. 이 혁명을 주도한 독일 공산당 창시자인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혁명과정에서 암살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복잡성을 잘 말해준다. 그렇지만 독일에서 과거의 사건을 뒤집어 파서 정치적으로 비방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지난 100년을 되돌아보며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유럽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발견하려 한다.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는 태도에 감격과 흥분은 절제되고 냉철한 성찰과 화해의 차분함이 돋보인다.

독일에서는 빨강이 퇴색하는데 우리에게선 더욱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우리는 역사청산이란 이름으로 빨갱이를 다시 호명하였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우리에게 최초로 국가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막 싹트기 시작한 국민의식을 고취해 왕정으로부터 민주공화정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평화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 이후 100년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의 확립과 공고화를 위해 온갖 종류의 분열과 갈등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치렀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우리의 민주역량을 보여준 촛불혁명이 대립과 분열보다는 평화와 통합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와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이다. 한 번 일어난 역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치욕스럽고 비통한 일일지라도 우리가 겪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역사에서 지울 수 없다. 대한민국이 친일파의 나라도 빨갱이의 나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광복 후 70여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 결과이다. 역사적 성찰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을 얻는 것이라면, 우리는 역사적 과정에서 발생한 분열과 대립을 극복해야 한다. 역사는 화해의 대상이지 결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역사청산’이란 이름으로 역사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0년을 되돌아보고 미래의 평화적 한반도를 꿈꾸는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가 역사전쟁을 촉발시켰다는 것은 이 시대의 역설이다. 그는 빨갱이 색깔론이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라고 말함으로써 사회 갈등과 분열의 오랜 환부를 다시 건드렸다. 빨갱이와 친일파만큼 무시무시한 정치적 어휘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대화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마비시킨다.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의도가 아무리 좋더라도 역사를 잘못 다루면 훨씬 더 커다란 화를 초래한다.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분열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함께 미래를 향해 가기 위해 잘못된 과거를 성찰하자”는 문 대통령의 좋은 뜻을 비웃듯 우리 사회는 이미 분열되고 있다. 한쪽에서 빨갱이, 종북 좌파, 김정은 대변인이라고 공격하면 다른 쪽에서는 친일파, 토착왜구, 아베 대변인이라고 비방하고 낙인찍는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건만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정파에 유리한 것만을 기억하고 불리한 것은 망각하려 한다.

3·1운동 이후 100년은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이 두 과정은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결코 분명하게 구별될 수 없다. 산업화 주역의 아들딸들이 민주투사가 되기도 하고,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도 산업화의 혜택을 향유한다. 이를 토대로 바람직한 미래사회를 건설하려면 잘못된 과거를 성찰하는 것만큼 과거의 역사적 성과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사회통합은커녕 빨갱이와 친일파로 분열돼 대립하고 있다. 역사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역사가 실종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에 힘 있는 사람만이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성찰을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깊이 다가온다. 독일처럼 빨갱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과거의 짐을 떨쳐버리려면 통합의 관점에서 역사를 대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청산’이라는 미망에서 깨어나 ‘역사화해’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