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치 400만㎞를 돌아다녔다. 좋은 목재를 구하려고 세계 곳곳을 떠돌면서 40년을 보냈다. 지구 한 바퀴 거리가 4만㎞ 정도이니 나무에 미쳐서 지구를 100바퀴나 돌았던 셈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를 5000번 넘게 왕복했다는 계산도 가능하다. 이렇듯 특이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주인공은 강원도 홍천 내촌목공소 고문인 김민식(64). 책에 담긴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는 “질 좋은 목재를 찾아 헤매는 집시”이자 “나무 이야기꾼”이다.
‘나무의 시간’은 그의 곡진한 나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책장을 넘기면 나무의 생태나 목재 시장의 변천사, 숲을 둘러싼 인류사의 갖가지 사건이 가지런하게 펼쳐진다. 향긋한 나무의 향기가 묻어나는 신간이라고 할까. 나무의 시간은 식목일이 있는 4월에, 숲으로 나들이하기 좋은 요즘 같은 봄날에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금주의 책이다.
평범한 ‘상사맨’, 나무 이야기꾼 되다
책을 펴낸 김민식의 이력부터 살펴보자. 20대 시절이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종합상사에 입사해 ‘상사맨’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샐러리맨이었다. 당시 목재산업이 수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한국은 세계 최대 합판 수출국이었다.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나 대통령은 매달 합판 수출액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런데 저자는 미국 출장에서 참담한 상황을 마주했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합판의 위상은 초라했다. 한국 합판의 가격은 한 장에 5~6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국 맨체스터에서 온 대머리 신사는 합판 10장으로 만든 모빌 하우스를 5만 달러에 팔고 있었다.
“우리 합판은 10장에 50달러, 같은 면적의 영국 바닥은 5만 달러. …그때부터 합판이든 원목이든 목재가 사용된 것을 보면 제조사를 추적하고 나무의 원산지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나무를 보고 또 보았다. 내 나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부터 주야장천 나무 생각만 했다. 목재 딜러, 목재 컨설턴트로 40년을 살았다. 건물에 들어가면 문을 보고 난간을 살피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어떤 목재를 어떻게 썼는지 궁금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을 보면서도 TV 세트의 나무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부터 살폈다.
이런 이력을 지녔으니 저자가 그려낼 나무의 세계가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저자의 박람강기한 필력이다. 목재에 관한 지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역사 건축 종교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솜씨를 보여준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김민식은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가 자작나무 숲에서 떨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서늘한 기운을 품은 자작나무의 특징을 자세하게 들려준다. 그러면서 자작나무를 구하러 다닌 경험담을 전하고, 천마도의 캔버스가 자작나무 껍질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작나무의 새잎처럼 맑고 빛나는 색은 없다고, “지상 최고의 연둣빛”이라고 치켜세운다. “이른 벚꽃 지고 나면 자작 잎 나오는 것을 챙겨 보라. 황무지 개척지에서도, 산불이 난 후에도 가장 먼저 숲을 만드는 나무가 바로 자작이다. …코제트가 울며 등을 떨고 있던 그 숲에 유독 자작나무가 보였다.”
숲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내용도 인상적이다. 인류사를 돌아보면 숲은 문명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곤 했다. 메소포타미아나 고대 그리스 문명은 지속적인 남벌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로마는 목재 부족으로 선박을 제대로 건조하지 못하자 그토록 대단했던 위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 프랑스 작가 샤토브리앙의 말처럼 “문명의 앞에는 숲이 있었고, 문명의 뒤에는 사막이 따른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김민식은 “창세기에는 생명의 나무를 건드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다”며 “숲과 나무를 건드려 낙원에서 인간이 추방된다는 신화는 지금 우리의 처지이기도 하다”고 적어두었다.
나무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다
언젠가부터 목수는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직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나무에 대해 좀 안다고 젠체하는 사람이, 좋은 목재로 건물을 지었다고 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나무와 관련된 통설 중에는 미신과 다를 바 없는 가짜뉴스가 적지 않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나무 랭킹을 매길 때 정상에 오를 게 분명한 소나무가 대표적이다.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는 습기에 약하고 쉽게 썩는다. 한국의 전통 건축물이 장수하지 못하는 건, 언젠가부터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한옥의 ‘디테일’이 미흡한 건 소나무를 사용해서다.
김민식은 “소나무는 최고의 품질을 가졌거나 특별한 개성을 지닌 목재가 아니며, 그저 지구에서 가장 흔한 나무”라고 잘라 말한다. 단단한 나무를 원한다면 활엽수를 써야 한다. 예컨대 많은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은 활엽수인 느티나무로 만들어졌다. 김민식은 “느티나무를 신단수로 모셨더라면 좋은 전통 목재 건축물이 더 많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라며 안타까워한다.
나무의 시간은 저자의 첫 책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끈한 글솜씨를 보여준다. 책을 읽고 나면 “그는 진작, 진력을 다해 저술가로 활동했어야 했다”(윤동천 서울대미술관 관장)는 저자를 향한 평가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옹골찬 나무처럼 야무진 신간이다.
김민식은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한 가지 업(業)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나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미신을 바로잡고 싶었다”며 “귀를 열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사랑하는 나무는 무엇일까. 김민식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활엽수인 참나무를 좋아한다”며 웃었다. 전화를 끊고 참나무와 관련된 챕터를 다시 펼치니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우리나라의 산림도 약 30%가 참나무로 추산된다. 흔하지만 좋은 나무가 참나무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참나무 사냥’에 나설 이들을 위해 일러둔다. 우리나라 어디에도 참나무라는 이름의 나무는 없다.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너도밤나무, 밤나무, 가시나무가 바로 참나무다. 우리 곁에 있는 참나무라고 부르지 않는 수많은 ‘참나무’를 발견해보시길.”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