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를 좋아한 끝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공주. 그 가엾은 운명을 구해 주기라도 하듯 바위 같기도, 파도 같기도 한 모호한 형상이 어머니처럼 손을 내민다. 안데르센 동화의 여성 희생적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것 같은 그림은 흑백의 드로잉이라 메시지가 더 강하게 다가온다.
칠레 태생으로 독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작가 산드라 바스케즈 델라 호라(52·사진)의 개인전이 대구 중구 봉산문화길 우손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유럽과 미국, 라틴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전시가 열렸고, 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작가지만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다. 아시아 첫 전시이기도 하다.
새의 부리를 한 여성의 몸통에서 손과 발이 나와 남자를 옥죄는 기괴한 장면, 머리에 깃털을 꽂은 여성이 날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밧줄에 묶여 벗어날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 뱀으로 얼굴을 감고 전사처럼 구름 위를 뛰어가는 여성….
전시장에 나온 작품들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다층적으로 해석이 된다. 작가는 정치 종교 성 민속 질병 죽음 등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류의 난제들을 주제로 다룬다. 인간 욕망의 추악한 면을 작가 특유의 블랙 유머로 그리는 그녀의 회화 세계는 국내 미술 시장에서는 ‘센’ 측면이 있다.
가장 소박한 매체인 연필로만 고집스럽게 그려왔기에 작품에서 묻어나는 진성성이 관람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특히 작품마다 페미니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기에 ‘미투’ 정국의 여진이 이어지는 요즘의 한국사회에 더욱 호소력이 있다.
이은미 큐레이터는 “예술의 근본 역할은 소통에 있기 때문에 미술이 굳이 첨단 기술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게 바스케즈 델라 호라의 예술철학”이라고 말했다. 6월 8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