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들] 목적 없고 무의미했던 날들… 주님과 동행하며 최고의 삶

입력 2019-04-08 00:04

어려서부터 나는 사는 것이 의미 없고 그냥 싫었다. 동화 속 인어공주처럼 아픔도 고통도 없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 길을 택하고 싶었다. 엄마 따라 교회에 다녔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야하는 시간들을 주로 만화책과 소설책, 음악 듣기로 보내며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물론 아무 꿈도 소망도 없어 고등학교 때에는 등교도 잘 하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툭하면 그냥 집에 오기도 했다.

청년시절도 다르지 않았고 지루한 시간을 밤낮 술로 달랬다. 고통도 염려도 없는 몽롱함이 좋았지만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두려움도 몰려왔다. 이런 목적 없는 나날을 보낼 때 엄마가 한마음교회에 가자고 했다. 가기 싫다는 나와 꼭 데리고 가려는 엄마와 전쟁 아닌 전쟁을 매주 치렀다. “아니,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렇게 괴롭히려면 사람들 다 모아놓고 하나님이 한 번 나타나든가!” 고함도 질렀지만 엄마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상황이 급박해졌다. 죽음이 임박하니 ‘아버지가 지옥을 가선 안 된다! 반드시 천국을 가셔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작정 울며불며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의 기도는 점점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원한다는 고백으로 바뀌었다. 면회 오신 목사님께서 복음을 전하셨고,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얼마 후 소천하셨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하나님, 천국, 마귀, 지옥 등 보이지 않는 세계는 내게 더 이상 허상이 아닌 실제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신앙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신앙생활에 회의가 느껴지며 내가 필요하고 나를 만족시켜주는 말씀만 골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하게 들렸다. 성경뿐 아니라 예수님은 실존인물이고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실임을 성령께서 비춰주셨다.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부활은 내 느낌과 감정에 따라 ‘믿고 안 믿고’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역사 속의 객관적 증거였다.

이 사실이 명쾌해지니 말씀이 선명히 들렸고 회개해야할 죄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요한복음 16장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회개할 근원적인 죄임이 비춰진 것이다.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근원적인 죄가 분명했다. 나는 예수님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마음의 영원한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고백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시간이 흘러도 믿음의 진보는 없이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다. 실제 삶이 따라주지 않은 것이다. 생활고로 너무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네가 고민하는 것이 전능자가 이 땅에 오셨다 가신 사건보다 크냐?’라고 하나님이 묻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놓고도 눈앞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통곡이 나오며 회개가 터졌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나의 신앙은 신념이며 추상적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기에 나에게 영원한 나라는 실제이며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기에 내 마음의 가장 소중한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실제가 되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님만을 의뢰하게 되며 회개의 자리가 얼마나 은혜의 자리인지 깨닫게 된다.

‘오늘 하루가 내 안의 예수님과 동행하는 최고의 삶이 되도록 성령께서 도와 달라’는 간절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내 안의 예수님을 꼭 붙드니 신앙생활의 기복이 없다. 어둠 가운데서 나를 건지시고 내 삶을 변화 시킨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손영숙 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