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태극기·독립선언서 배포… 담임목사는 총독부에 규탄서

입력 2019-04-04 00:01
서울 승동교회는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새뮤얼 무어(1860~1906) 목사가 설립한 교회다. 한국교회사적으론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과 통합이 갈라지는 분기점에 있던 상징적 교회다. 신학적 차이로 예장통합은 1959년 9월 서울 연동교회에서, 예장합동은 같은 해 11월 승동교회에서 별도의 총회를 개최한다. 시간이 흘러 총신대를 운영하는 예장합동은 1만1922개 교회에 268만여명이, 장로회신학대를 운영하는 예장통합은 9096개 교회에 271만명이 소속된 한국교회 대표 교단으로 자리 잡는다.

이처럼 한국교회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승동교회가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승동교회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은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파고다공원(탑골공원)과 태화관, YMCA회관에 인접해 있다는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서울 승동교회 소속으로 1919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원벽 청년면려회장과 차상진 목사(사진 왼쪽부터).

교회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김원벽과 차상진이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며 청년면려회 회장을 지낸 김원벽은 1894년 황해도 은율군에서 김태석 목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는 1917년 연희전문학교 첫 학생으로 상과에 입학해 부친의 친구이자 교장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 머물며 공부했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고 웅변이 뛰어나 연희전문학교 기독학생회 회장에 피선됐다.

그는 1919년 2월 보성전문학교, 세브란스의전,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 등의 학생대표들과 함께 학생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3월 1일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소식을 YMCA 간사였던 박희도로부터 접하고 2월 20일 학생독립선언서를 모두 소각했다. 기독교와 천도교가 같이 일으키는 거사에 동참키로 결의한 뒤 28일 태극기와 3·1독립선언서를 준비했다.

김원벽은 승동교회와 연희전문학교를 대표해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거사계획을 두고 승동교회 청년과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과 수차례 모임을 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 검사는 그해 3월 18일 직접 승동교회와 정동교회 예배당을 압수수색했다. 두 교회가 3·1운동의 진원지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김원벽은 1920년까지 옥고를 치르고 192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듬해 잠시 ‘신생활’ 잡지의 기자로 일한 뒤 연희전문학교 사무직원으로 근무했다. 1924년 최남선의 알선으로 시대일보에서 경리를 담당했다. 승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1928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김원벽은 1962년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고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됐다.

승동교회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또 다른 인물은 차상진 목사다. 1875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차 목사는 31세인 1906년 교회에 출석했다. 4년 뒤 장로로 피택된 그는 191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승동교회 5대 목사로 취임했다.

차 목사는 김원벽 등 청년 학생들이 1919년 3월 5일 주도한 만세시위 현장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했다. 같은 달 14일 그는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 평북 정주교회 조형균 장로, 평북 의주교회 문일평 집사 등 12명과 함께 ‘12인 등의 장서’를 작성해 조선총독부를 찾아갔다. 가로 25㎝, 세로 18㎝의 문건 이름은 장서였지만 내용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이었다.

차 목사는 장서를 제출하자마자 체포됐다. 김백원 목사 등은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장서를 낭독했다. 차 목사는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했던 김원벽 등 242명과 함께 재판을 받고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듬해 4월 특사로 석방됐다.

당시 기독신보는 차 목사의 출소 소식을 이렇게 소개했다. “차상진씨는 본래 기질이 섬세하고 약한 터에 겸하여 고통을 받은 결과로 얼굴빛은 희여 부우시고 손목은 바싹 말라 부러질 듯 목은 가느다랗게 되어 다시 말하면 뼈와 가죽만 남았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닌데 본월(5월) 2일 주일에 자기가 늘 서서 설교하던 강단에 서서 교회에 대하여 인사를 드릴 때 창자 속에서 끓어 나오는 목소리로 시작하더니 중간에 와서는 한참 중지하고 우두커니 서서 있는데 이것은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열기에 북받쳐 두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술술 나오고 입가에는 기가 막히는 소리로 ‘부형 자매 제씨 오늘날 이렇게 만나 뵈옵는 것은 여러분의 기도로 인함인 줄 알고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마치더라.” 차 목사는 1922년 1월 사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독립운동가 여운형도 승동교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운형은 1907년 이웃 동네 형인 차 목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영접했다. 1908년 동생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월 20원의 사례를 받고 승동교회 조사로 활동했다. 여운형은 당시 승동교회 담임이던 찰스 알렌 클라크(곽안련) 목사를 도와 교회를 섬겼다.

승동교회 16대 담임인 최영태 목사가 3일 서울 종로구 교회 앞에서 교인들이 주도했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승동교회 16대 담임인 최영태(48) 목사는 3일 “100년 전 승동교회뿐만 아니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민족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복음이 한 사람의 인격 가운데 잘 스며들었기 때문”이라면서 “이것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배워야 할 복음의 확장성”이라고 설명했다.

최 목사는 “초창기 교회를 지킨 성도들의 4~5대 후손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면서 “그렇다 보니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의 마음이 크다. 개인 기도제목 1번이 나라를 위한 기도인 분들이 많을 정도로 교회의 영적 유산을 이어받은 성도들의 자부심이 크다”고 소개했다.

서울시는 1993년 2월 3·1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교회의 역사성을 인정해 교회 앞마당에 기념 표석을 설치했다. 교회당 건물은 2002년 4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됐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