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배구 명장 이정철, 지휘봉 놓고 2선으로

입력 2019-04-02 21:07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에서 각각 세 번씩 우승을 차지하는 등 팀을 2010년대 한국 여자배구의 신흥 강호로 자리매김시킨 명장 IBK기업은행의 이정철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이 감독은 카리스마 리더십과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2011년 모습을 드러낸 신생팀 기업은행을 창단 2년 만에 통합우승으로 이끌었다. 사진은 2016-17시즌 V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흥국생명을 꺾고 우승을 한 기업은행 선수들이 이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는 모습. 뉴시스

“예전엔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팀을 이끌며) 항상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매년 성적에만 너무 매달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리빌딩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한 달 전 IBK기업은행이 봄배구 탈락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정철 감독은 담담하게 속내를 밝혔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코트 위에서 불같이 호령하던 기존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 감독은 어쩌면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었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IBK기업은행을 창단 때부터 지휘해온 이 감독이 일선에서 물러난다. IBK기업은행은 2일 “이 감독의 보직을 ‘고문’으로 변경했다”고 밝혔다. 구단 관계자는 “이 감독이 시즌을 마친 후 당분간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IBK기업은행이 2011년 창단된 후 8시즌 동안 팀을 이끌며 명실상부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다.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에서 각각 세 번씩 우승을 차지했고, 2013년부터 6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다. 창단 2년 차인 2012-13시즌에는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단기간 통합 우승을 이뤄내는 역사를 쓰기도 했다. 매번 리그가 개막할 때면 경쟁팀 감독들은 입을 모아 IBK기업은행을 우승 후보로 꼽으며 경계했다.

위대한 성과는 고된 훈련과 아낌없는 쓴소리로 이뤄졌다. 이 감독은 연습한 만큼 성적이 나온다는 소신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가르쳤다. 작전타임 때는 굳은 표정으로 실수를 질책했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대놓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일부 팬들은 화를 자주 내는 그가 심술궂은 ‘가가멜’과 닮았다며 조롱 섞인 비판을 했다.

그러나 코트 바깥에서 이 감독은 누구보다 선수를 생각하며 아꼈다. 은퇴하는 선수가 있으면 진로를 함께 고민하며 걱정을 덜어줬다. 필요할 때에는 “부드러운 남자가 되겠다”고 공언하며 선수단을 보듬기도 했다. 장소연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이 감독에 대해 “한마디로 생각이 깊은 ‘츤데레’”라며 “연습 때는 무섭지만 끝나면 잘 챙겨주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정철 감독. 뉴시스

세상에 열흘 붉은 꽃은 없는 것 마냥, IBK기업은행도 올 시즌을 4위로 마감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6라운드 막판까지 GS칼텍스와 3위 자리를 두고 다퉜으나 막판 뒷심이 부족했다. 외국인 선수 어나이가 득점 1위(792점)에 오를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지만, 팀 전체 공격 성공률은 37.09%로 5위에 그쳤다. 관계자는 “팀에 피로감이 누적되며 구단 차원에서 변화와 혁신을 해야 한다는 안팎의 주문이 많았다”고 했다.

IBK기업은행은 이 감독에게 “팀을 명문 구단으로 도약시킨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며 그간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창호 IBK기업은행 단장은 “선수들이 신바람 나게 배구를 하고 팬들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는 배구단을 만들어나가겠다”고 전했다.

방극렬 기자 extre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