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같은 우리 딸? 아이는 고통 받는다

입력 2019-04-06 04:02
사진=게티이미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자주 편찮으셨고 또 경제적으로도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장남인 제가 괜히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어요. 부모님이 또 워낙 이런저런 걱정을 우리한테 다 털어놓으시니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내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좀 일찍 시작했던 거 같아요. 제 용돈벌이로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신문배달이나 편의점 알바 같은 걸 하면서 부모님 대신 동생들 용돈을 주기도 했고요. 대학생 때도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이런 모습 때문에 ‘착실하다’ ‘대견하다’ ‘효자다’ 이런 말들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는데 사실 그게 더 부담이 됐어요. 그런 기대를 깨면 안 된다는 부담 같은 게 있어서 말이나 행동을 더 조심하게 됐고요.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이 있어도 솔직하게 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나중에는 또래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하겠더라고요. 어릴 때 다른 아이들처럼 어른들한테 어리광을 피워보지 못한 게 종종 아쉽기도 해요.”(30대 회사원 이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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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스럽다고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아이가 너무 어린 나이에 자신이 부모인 것처럼 가족을 돌보는 행동을 하는 상태를 전문가들은 ‘부모화’라고 부른다. 부모화한 아이들은 가정에서 배려·위로·보호·중재 같은 역할을 하고 부모의 욕구를 대신 채워주는 대리자가 되기도 한다. 부모·자식의 역할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들은 외형상 위험해 보이기보다 순종적이고 속이 깊은 듯 보여 ‘기특하다’ ‘어른스럽다’ 같은 칭찬을 받는다. 배려심과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해서 사회생활도 잘 해나갈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상담 전문가들은 부모화를 경험한 이들이 성인이 된 뒤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이를 계기로 그동안 억눌러온 분노와 좌절을 쏟아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한다. 숙명여대 대학원 아동심리치료 전공 문비씨는 석사학위논문 ‘부모화 경험이 대인관계 문제에 미치는 영향’에서 “(부모화 경험을 많이 할수록) 사람을 쉽게 사귀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는 한편 타인을 통제하려고 하거나 쉽게 짜증을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부모 역할을 떠안는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자신의 내부에 축적하며 속으로 곪아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과 협력하기보다 혼자 짊어지는 경향이 강한 탓이다. 보통 부모화 경험은 우울과 불안, 긴장, 소외, 낮은 자존감 등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관찰되는 건 자기 욕구를 무시하거나 억누르는 반면,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신보다 남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모습이다. 또 경쟁적·완벽주의적 성향을 갖고 강박적으로 성취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타인을 통제하거나 지나치게 간여하려 드는 경향과 함께 피학적인 성격이 나타나기도 한다. 강한 자기애나 수치심, 과도한 죄의식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열등감이나 수치심으로 인한 사회불안 증세를 보일 가능성도 높다. 결혼한 뒤에는 자녀에게 같은 역할을 대물림하며 세대 간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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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회서 간과되는 아이의 고통

부모화 경향은 부모가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아이에게 지나치게 큰 역할을 기대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자녀는 순종만을 바람직한 덕목으로 여기며 부모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한국심리치료상담학회장을 지낸 김용태 박사는 저서에서 “부모가 비현실적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녀의 충성심을 착취하게 되고 자녀는 자신의 욕구를 돌보지 못한 채 결핍된 상태로 성장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부모가 아이의 활동에 무관심한 채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환경에서도 부모화가 나타날 수 있다. 아이가 부모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면 부모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부모가 어린 시절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리적·정서적 돌봄을 받아본 적 없는 경우 아이에게 무심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부모화는 아이가 짊어지는 돌봄 책임의 수준과 지속성 등에 따라 파괴적 부모화, 적응적 부모화, 비부모화로 구분된다. ‘적응적’ 부모화는 당장 아이가 가족을 돌보는 정도가 과하기는 해도 자기 역할이 필요한 시기가 지나면 스스로 ‘부모 노릇’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상태다. 부모가 자녀에게 조력자로서 일정한 책임을 부여하는 경우 등이 해당한다.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심리학과 구소진씨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정상적인 범주 내에서의 역할 전이는 가족 내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부모-자녀 관계 발달의 경험이 되기도 한다”고 기술했다. 이와 달리 파괴적 부모화는 아이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속적으로 떠안은 채 그 굴레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상태다. 구씨는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는 유형은 파괴적 부모화”라며 “파괴적 부모화는 돌봄이 상호 호혜적이지 않고 자녀가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여 불공평을 경험할 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부모화는 부모가 신체적·심리적·정서적·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환경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파괴적 부모화는 알코올과 약물을 비롯한 각종 중독 가정, 빈곤·맞벌이·한부모·재결합·이혼·별거 가정, 아동이 많은 가정, 부모에게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정, 사회적 교류가 없는 가정, 아동을 학대하거나 무시하는 가정 등에서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정 유형의 가정이 아니라 아이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모든 가정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숭실대 대학원 기독교학과 석미정씨는 박사학위 논문 ‘부모화된 미혼여성의 삶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에서 부모화된 미혼여성의 삶에 대해 ‘부모가 있어도 고아 같은 삶의 부정성과 주체적 삶의 긍정성이 불균형적으로 공존한다’고 요약했다.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부모의 부재를 경험하며 형성된 부정적 정서가 혼재돼 해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석씨는 “(조사) 참여자들은 성취지향적인 개인주의와 효를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혼재돼 있는 한국의 사회구조 속에서 이 두 가지 가치에 모두 도달하려고 하는 이중구속의 딜레마를 겪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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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한 출구

유교문화권에서 부모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낮은 편이다. 국내에서 부모화 관련 연구가 발표되기 시작한 건 서양보다 50년 정도 늦은 2000년대 들어서다. 전문가들은 부모화가 아이의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경험이지만 효(孝)가 강조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를 배려하는 아이의 행동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톨릭대 상담심리대학원 서수라씨는 석사학위 논문 ‘성장기 부모화 경험이 대인관계 문제에 미치는 영향’에서 “이 때문에 부모나 가족을 강박적으로 배려하는 자녀들의 심리적 경험이나 주관적 고통을 간과해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건강한 발달을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로 부모와 자녀 간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가톨릭대 대학원 상담심리학 전공 정해인씨는 ‘성장기 부모화 경험이 낭만애착에 미치는 영향’에서 부모·자녀 간의 의사소통에 대해 “가정에서는 가족원들 간의 상호작용을 촉진시키고 성인사회에서는 서로의 정보 교환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여 청소년 자녀의 심리인 자아존중감 발달과 사회화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부모화 경험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 대해 전문가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수용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자신을 받아들인 이들은 타인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대인관계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에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서수라씨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 즉 자기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서씨는 “이상적인 자기나 거짓 자기가 아닌 진정한 자기에 대해 탐색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동안 회피해오거나 왜곡해온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개인상담이나 집단상담 같은 치료적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