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카슈끄지 유족 입막음 의혹

입력 2019-04-03 04:04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오른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오른쪽 2번째)가 지난해 10월 수도 리야드에서 터키 이스탄불 주재 영사관에서 피살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아들 살라(왼쪽)와 동생 사헬 등 가족들을 만나고 있다. AP뉴시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자국 암살팀이 살해한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자녀들에게 입을 열지 않는 대가로 고가의 주택과 보상금을 지급했다. 사우디 왕실이 유가족을 돈으로 입막음하고 암살 요원들의 사형 집행을 막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사우디 정부는 카슈끄지의 자녀 4명에게 각각 400만 달러(약 45억원) 상당의 주택을 제공하고 별도로 매달 1만 달러(약 1130만원)를 지급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자녀들이 살해된 아버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못하도록 사우디 정부가 손을 쓴 것이라고 사우디 전현직 관리들은 전했다.

사건의 배후로 알려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친동생 칼리드 빈 살만 왕자가 사우디 정부와 카슈끄지 자녀들의 협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칼리드 왕자는 사건 당시 미국 주재 사우디 대사로 근무했다.

실제로 카슈끄지 자녀들은 사우디 정부의 보상금 지급 방침에 대한 WP의 논평 요청에 침묵을 지켰다. 최근 WP에 사우디의 변화를 촉구하는 글을 기고했던 두 딸 노아와 라잔도 관련된 언급을 피했다. 형제 중 유일하게 사우디에 남기를 원하는 장남 살라는 처음부터 공개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녀들이 침묵하는 것이 돈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 발생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빈 살만 왕세자와 살라가 악수하는 사진이 공개됐다. 이를 두고 사우디 왕실이 살라를 압박해 억지 화해를 연출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나머지 형제들도 사우디 왕실을 직접 비난하는 것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다.

자녀들이 아버지 살해 사건에 가담한 요원들의 재판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수천만 달러를 더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사우디 검찰은 사건과 관련해 현장 책임자 등 11명을 기소했고 5명에게 사형을 구형한 상태다. 하지만 사우디법에 따르면 피해자 가족들이 보상금을 받는 대신 피의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사형 판결을 막을 수 있다. 실제로 사우디 정부는 암살팀을 구명하려는 조짐을 보여왔다. 암살 작전을 총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사우드 알 카타니 궁정 고문은 기소조차 되지 않은 데다 기소된 피고인들도 무죄를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 사우디 정부 관계자는 이번 보상 조치가 범죄 또는 자연재해 피해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오랜 정부 관행 차원이라고 해명했다. 또 보상을 받고 침묵을 지킬 의무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