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정다주 전 행정처 심의관(현 의정부지법 부장판사)이 2일 법정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사법농단 의혹 관련 문건 지시자와 작성자가 4년여 만에 피고인과 증인으로 만난 것이다. 현직 법관 중 처음으로 증인 신문에 임한 정 판사는 임 전 차장 지시로 여러 문건을 생산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임 전 차장은 정 판사를 직접 신문하다 감정이 격해져 중간에 질문을 중단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부장판사 윤종섭) 심리로 열린 임 전 차장의 직권남용 혐의 등 5회 공판기일에 정 판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당일 재판부에 ‘증인 지원 신청서’를 제출한 정 판사는 법정 밖 별도 공간에서 대기하다 법정으로 들어섰다. 방청석에서 대기하는 통상의 방식에 부담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석에 앉은 임 전 차장은 대각선 방향의 증인석에 앉은 정 판사를 쳐다보지 않았다. 증인 선서를 위해 정 판사가 자리에 일어섰을 때도 피고인석 책상에 놓인 서류를 읽으며 애써 외면했다.
검찰은 사법농단 의혹 문건들이 작성된 경위를 집중 추궁했다. 검찰은 2015년 8월 예정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면담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안 말씀 자료’를 제시했다. 이 문건에는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 정지 처분 사건, KTX 해고 승무원 사건 등이 정부 협력 사례로 기재돼 있다.
검찰이 “피고인(임 전 차장) 지시로 작성해 전달한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 정 판사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해당 문건에 나오는 표현 ‘과거 왜곡의 광정(匡正·잘못된 걸 바로잡음)’을 쓰게 된 경위를 묻자 그는 “피고인이 제목을 그렇게 달아달라고 이야기했다”고 증언했다.
정 판사는 임 전 차장이 문건 작성을 지시하면서 문구나 단어 등을 직접 구술해준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 집행 정지 검토’ 문건에선 주요 내용과 대략의 결론까지 직접 제시했다는 것이다. 정 판사는 사법부 권한 남용 내용이 많이 담긴 문건을 작성하면서 부담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임 전 차장은 변호인 대신 정 판사를 직접 신문하며 자기 변호에 가까운 질문을 했다. 그는 “검찰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행정처 인력으로 오로지 사법부의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버텨온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 판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런 측면이 있다”고 답했다.
임 전 차장은 또 “전통적으로 검찰 출신이 민정수석으로 임명되는 상황에서 법무비서관실은 유일한 피난처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정 판사는 “피고인의 표현에 모두 동의하긴 어렵다”면서도 “대법원에서 먼저 (소통 창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법무비서관실로 이해하고 업무를 수행했다”고 답변했다. 임 전 차장은 신문 도중 “감정이 격해진 것 같다”며 질문을 멈추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이날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의 USB의 압수수색 과정이 적법했다고 보고 증거능력을 인정해 증거로 채택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