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줄고 ‘지대추구’ 골몰… 경쟁 사라지는 미국 경제

입력 2019-04-03 04:02
“벤처투자가인 피터 틸이 말했듯이, 경쟁이란 패배자의 몫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지난달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처럼 쏘아붙였다. 미국 기업들이 정당한 경쟁에 뛰어들기보다 ‘지대추구(rent seeking)’에 골몰하고 있고,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은 사라졌다는 취지의 비판이었다. 지대추구란 기득권층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울타리 안에서 로비 등의 비생산적 활동에 자원을 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 같은 지대추구의 결과는 저소득층에서 부유층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일”이라고 한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쓴소리는 마침 ‘미국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는 국면에서 나왔다. 최근 미 상무부는 지난해 4분기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6%에서 2.2%로 수정 확정했다. 잠정치보다 확정치가 크게 하향된 이유는 소비와 기업 투자 감소였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등은 올해 미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1%로 내려잡았다.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2010년을 끝으로 3.0%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경기부양에 힘입은 숫자였고 저성장의 불안감은 애초부터 컸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시티그룹이 70개 기관투자가를 설문조사한 결과 80% 이상이 “3년 내 경기침체가 온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조차 “미국 경제가 둔화에 가까운 곳으로 가고 있다”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

잘나가던 미국 경제가 동력을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미국 경제는 저성장, 소득 불균형, 재정수지 악화 등 구조적 문제가 만성화되고 있다”며 “근본적인 요인으로 ‘시장지배력 심화’가 지적된다”고 분석했다. 감세 정책은 부유층 혜택으로 귀결됐고, 다국적기업의 성장은 내수 주력 기업을 도태시켰으며, 금융회사들의 지대추구가 성장잠재력을 저하시켰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상장기업들은 정작 정부로부터 받은 감세 혜택의 대부분을 자사주 매입과 경영진 배당에 썼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 같은 돈이 사상 최대치인 1조1000억 달러였다고 주장한다. 끌어올려진 주가는 경영진의 성과급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도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GDP의 13.7% 수준에 머물렀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2일 “미국의 산업 구조가 업종마다 2~3개의 지배적 사업자들로 재편되면서 과연 자유시장경쟁이 제대로 작동하느냐 하는 의문이 커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독점 구조가 고착화하면서 새 참가자의 진입장벽은 높아졌고, 이는 조금씩 소비자의 손해로 이어지고 있다는 견해다. 거대 기업들의 로비 활동은 생태계의 활력을 떨어뜨렸다. 상장사 수가 줄어드는 추세가 경쟁 욕구 상실을 방증한다.

하 교수는 “미국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한국에서는 증폭돼 나타난다”고 진단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장벽은 한국이 미국보다 높다. 주택시장의 지대추구 문제도 한국이 더 고질적이다. 미국 젊은이들이 집 마련을 포기하고 있고 캘리포니아에서는 노숙자가 대거 발생한다지만 집값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한국이 미국보다 높다. 하 교수는 “대기업은 중소기업과의 상생이 장기적 이익이라 생각해야 하고, 제도적으로도 규제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