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抗日’ 위해 좌·우 세력 손 잡았지만 논란 불씨로 작용

입력 2019-04-01 21:55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1941년 12월 10일 발표된 대일선전성명서. 일본을 한국과 중국,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최후의 승리까지 혈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왜구를 한국과 중국,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구축(驅逐·쫓아냄)하기 위해 최후의 승리까지 혈전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이런 내용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임시정부 정규군인 광복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실행 불가능한 선전포고였다. 광복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동안 공식적인 군 역사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했다. 아직 진영 논리의 틀을 벗지 못한 광복군에 대한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다.

재조명되는 광복군 역사

문재인정부는 올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에서 창설된 광복군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역대 정부 가운데 광복군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 당국은 광복군을 새삼 ‘국군의 뿌리’로 평가했다. 국방부는 지난 2월 펴낸 홍보물에서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발전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와 지도자들을 모아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임시정부 수립 20여년 만에 생긴 광복군은 대한민국의 첫 공식 군대가 됐다’고 명시했다.

광복군 제1지대(사진 위), 3지대 대원들을 찍은 기념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한 후 총사령부 아래 중국 내 근거지와 활동 지역을 중심으로 제1·2·3·5지대로 나눈 군 조직을 편성했다. 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제공

한·중 정부는 지난 3월 29일 중국 충칭(重慶)에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 복원 기념식을 열었다. 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의병·독립군·광복군에 대한 역사를 다룬 ‘국방사 소책자’를 조만간 발간할 계획이다. 육군은 광복군 핵심 간부를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를 재조명하는 데 힘을 쏟았다. 육군은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를 지난해 9월 무대에 올렸으며 4월 21일까지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월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도 육군사관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시키고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여당 의원들은 광복군 창설일을 국군의 날로 바꾸는 결의안도 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33명은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인 2017년 9월 ‘국군의 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정부에 현행 국군의 날 기념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인 한국광복군 창설일 9월 17일로 변경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보수와 진보, 달리 보는 軍 역사

문제는 광복군에 대한 평가가 보수와 진보 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보수 진영은 사회주의 계열의 광복군 활동을 폭넓게 인정하고 포상하는 데 반대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꼽힌다. 독립군 출신인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까지 지냈지만 그의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국가보훈처는 광복 이후에 사회주의 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유공자 포상을 할 수 있도록 심사 기준을 완화했지만 김원봉은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 기준에는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했을 경우 포상할 수 없도록 하는 단서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해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지낸 뒤 58년 김일성에 반대한 옌안파(延安派) 제거 때 숙청됐다.

나아가 광복군 평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점을 둘러싼 논란과도 연결될 수 있다. 진보 진영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일을 공식적인 정부수립 시점으로 평가한다. 이는 임시정부 정규군인 광복군을 대한민국 첫 공식 군대라고 봐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헌법 전문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시한 것 역시 광복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로 거론된다.

반면 이명박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규정하기도 했다. 보수 성향 전문가들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한 1948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바꿔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보수 정권 시절 공식적인 대한민국 정부수립 시점을 임시정부 출범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군에 대한 평가가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광복군을 둘러싼 이념 논란은 좌·우파 무장투쟁 세력을 합해 조직된 태생 자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1941년 11월 발표된 ‘한국광복군 공약(公約)’ 제1조는 ‘무장적 행동으로써 적의 침탈 세력을 박멸하려는 한국 남녀는 그 주의 사상의 여하를 물론(勿論)하고 한국광복군의 군인될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광복군 대원들에게 이념 성향을 떠난 군 본연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었다. 항일 투쟁을 위해 좌·우 세력이 손을 잡았던 상황이 오늘날 이념 논란의 불씨로 작용하게 된 셈이다.

‘軍 역사관’도 변할까

그동안 광복군 역사는 한민족전쟁사나 국방사 등 우리 군 역사서에 자세하게 기술되지 못했다. 광복군 활동은 간략하게 소개되는 정도였으며, 군 역사는 주로 광복 이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여전히 군 내부에서는 “국군이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지만 광복군을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첫 군대라고 못 박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변경하는 데 대해서도 신중론이 우세해 보인다. 국군의 날 변경안 자체가 국방부에서 구체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상태다. 1956년 제정된 현재 국군의 날(10월 1일)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육군 3사단 23연대가 처음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날짜로 알려져 있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 창설일(9월 17일)로 변경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북진 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군 관계자는 1일 “군에서는 당연히 광복군에 대해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할 국군의 뿌리’라고 인식하고 있다”며 “다만 광복군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평가하거나 기술할지는 역사학자들의 연구뿐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거쳐 진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