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 여파로 기존에 받은 수주물량이 해약되는 등의 영향으로 수출 수주가 2개월 연속 감소했습니다.”(화천기공)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따른 무역전쟁, 유럽의 더딘 경기회복과 중국의 성장 둔화로 인한 국제 물동량 정체 등으로, 업황 개선에 대한 신호가 나타나지 않은 만큼 투자 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한국해양진흥공사)
지난해의 ‘경영 성적표’가 공시되는 3월 말 주주총회 시즌에 투자자들을 향해 ‘미·중 무역전쟁’ 여파를 호소하지 않은 기업은 드물었다. 주요 2개국(G2) 싸움 속에서 대외 환경은 최악이었지만, 임직원이 최선을 다했다는 설명이었다. 정밀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한농화성은 “2019년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심화, 노동정책 급변으로 저성장 기조를 쉽게 탈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고 토로했다. 이미지센서용 반도체칩을 만드는 옵토팩은 “미·중 무역전쟁 ‘공포심리’가 격화됐다”고 했다.
대기업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KCC건설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우려 심화, 미국 달러화 강세로 광물자원 투자수요가 위축됐다”고 알렸다. 어두운 변수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효성티앤씨는 “2019년에도 세계 경제는 무역전쟁 지속에 따른 교역 둔화, 주요국의 재정정책 동력 약화,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 등 경기 하방압력이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중 무역전쟁은 지난해 3월 미국이 중국산 철강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그 다음 달에 중국이 미국산 자동차와 대두(大豆)에 보복 관세를 매기면서 시작됐다. 고위 각료들의 협상이 이뤄지고 온화한 코멘트가 나올 때엔 투자 심리가 개선됐지만, 정반대로 세계 경제를 긴장에 빠지게 하는 사건도 많았다.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의 최고재무책임자(CFO) 멍완저우 부회장이 캐나다에서 체포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 이후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증시가 크게 출렁였다.
이렇게 흘러온 무역전쟁 1년은 지난해 한국 기업의 살림에 실질적 손해를 준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지난해의 잠정 영업실적을 발표한 비금융 상장사 1549곳을 분석한 결과, 매출액이 전년 대비 4.0%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0.9% 감소했다고 31일 밝혔다. 애초 3.8%의 영업이익 증가를 예상했던 데 비춰보면 큰 감소폭이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미·중 무역전쟁 영향 등으로 지난해 4분기 수익성이 예상보다 급격하게 악화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성과급 등 기업의 비용 지출이 집중되는 4분기임을 고려하더라도 이전과 비교해 그 하락폭이 컸다. 이유는 역시 중국 경제의 동력 상실, 그에 따른 한국의 대중(對中) 수출 부진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한국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해온 최대 시장이다. 대부분 업종에서 수요가 감소한 가운데 눈에 띄게 실적 악화가 두드러진 업종은 석유화학, 철강, 에너지 등이었다. 문제는 지난해 4분기의 상황이 올해 내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는 “전년 대비 올해 영업이익 감소분인 20조원의 약 60%는 중국의 경기 둔화에 따른 영향이었다”며 “무역전쟁이 한국 산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올해에 보다 심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달 1~20일 대중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6% 줄어들며 두 자릿수 감소세를 이어갔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으로 고통스럽던 때와 현재를 비교하는 실정이다. 씨티그룹은 최근 한국 수출에 대해 “자동차와 조선업 부문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대중 수출 부진 등으로 마이너스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