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내에서 서훈(사진)국가정보원장에 대한 회의론이 강하게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 대화를 물밑에서 이끌며 지난해 한반도에 조성된 평화 무드에 크게 기여했던 서훈 원장의 입지가 축소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익명을 요구한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27일(현지시간) “일부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들이 서 원장에 대해 회의론을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서 원장이 대북 제재와 관련해 북한 입장을 전달하면서 미국의 양보만 요구한다는 불만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미국 정부 당국자들은 서 원장이 공식·비공식 채널로 전해주는 북한 관련 정보도 미국이 직접 북한과 접촉한 결과와 괴리감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부 관리들 사이에선 서 원장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론이 제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 철도·도로 연결 공사 등 남북 경제협력 사업과 관련해 대북 제재 예외를 요구하면서 미국 입장에선 수용하기 힘든 요구만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 원장에 대한 미 정부의 기류가 확연히 달라진 것은 이런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는 한반도 정세를 대화 모드로 전환시킨 일등공신으로 서 원장을 꼽아왔지만,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서 원장은 그동안 남·북·미 3자 관계를 조율하는 막후 해결사 역할을 해왔다. 올해에만 두 차례나 서 원장이 극비리에 미국을 방문해 지나 해스펠 CIA 국장을 만났다는 얘기가 기정사실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나 하노이 결렬 이후 북핵 협상이 다시 교착 국면에 빠지자 온건파인 서 원장에게도 책임론이 번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미국이 ‘남탓’을 하며 서 원장을 흠집 낸다는 비판도 있다.
남·북·미 3자 간 메신저 역할을 했던 서 원장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면 북한 비핵화 협상을 둘러싼 대화 채널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국정원과 북한의 통일전선부, 미 중앙정보국(CIA) 간 막후 정보라인 역할은 크게 약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추가 제재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대표적인 대화파인 서 원장의 파워가 약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서 원장의 입지가 축소될 경우 북핵 협상의 주도권을 청와대와 백악관이 완전히 장악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슈퍼 매파’ 참모들을 배제하고 자신이 북핵 협상을 주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에서도 청와대의 역할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 측에선 서 원장의 공백을 메울 인물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을 주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차례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이끌었고, 청와대에서 북한 비핵화 업무까지 떠맡게 된 김 차장이 한·미의 새로운 조율사로 부상할지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