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김현길] 즐거운 축구

입력 2019-03-29 04:02

“즐기라는 말을 되게 많이 하잖아요.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 저는 세상에서 그 이야기가 제일 싫어요. 절대 믿지 않습니다.”

한국 농구의 중심에 서 있다 방송인이 된 서장훈이 몇 년 전 방송에서 했던 말이다. 그의 입을 빌리자면 그에게 농구는 전쟁이다. 즐기며 원하는 결과까지 낼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는 “어릴 때 농구를 엄청 좋아했지만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나선 단 한 번도 ‘농구를 즐겨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서장훈의 말은 꽤 반향이 있었던지 그 방송 영상을 캡처한 게시물이 지금도 인터넷에서 가끔 눈에 띈다. 듣기 좋고 익숙한 ‘달콤한 조언’보다 ‘뼈 때리는’ 그의 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서장훈의 말이 떠오른 건 지난 11일 파울루 벤투 축구대표팀 감독의 말 때문이었다. 벤투 감독은 3월 대표팀 발표 자리에서 6개월간 살펴본 선수들에 대한 바람을 함께 드러냈다. 그는 선수들의 기술과 빠른 학습 능력에 만족감을 나타내면서도 “조금 더 선수들이 즐기면서 경기했으면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필요 이상으로 부담을 가지면서 경기에 나서다 보니 개인 능력치와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서장훈의 말처럼 즐기면서 경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좋아서 시작한 운동이라도 본업이 된 후부턴 준비 과정의 고단함과 결과에 대한 압박감을 피할 수 없다. 원하는 성과를 위해선 서장훈과 같은 철저한 엄격함이 더 자주 요구된다. 로저 페더러가 얼마 전 BNP파리바 오픈 결승에서 지고도 “건강하고, 즐겁게 경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건 그가 100승을 달성한 ‘테니스 황제’인 것과 무관치 않을 터이다. 당시 시상식에서 웃었던 그도 10년 전 호주오픈 결승에서 라파엘 나달에 패한 후엔 시상대에서 눈물을 쏟았다. 메이저대회를 13번이나 제패했지만, 그때 기준으로 피트 샘프라스의 최다 우승 기록(14번)에 닿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둘의 말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실은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벤투 감독의 말은 내용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무작정 즐기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즐거움에만 몰두하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본인이 선수였고, 여러 나라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결과 한국 선수에게 발견되는 가장 도드라지는 차이가 먼저 눈에 띄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차이를 그는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태도에서 발견한 게 아닐까. 더구나 첫 대회인 아시안컵을 경험한 다음 내비친 속내라면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이 얼마나 즐길 준비가 돼있느냐다. 유소년 및 학원 스포츠, 소속팀에서 경기를 즐긴 경험이 없는데 대표팀에서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국내에선 종목 자체보다 지도자들의 지도 방식 등 종목을 둘러싼 환경이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다. ‘경기를 즐기라’는 말은 ‘수비를 더 적극적으로 해라’처럼 지시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그래서 벤투 감독의 다음 말이 경기를 즐길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벤투 감독은 “훈련했을 때만큼 즐겁게 경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희의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즐기라는 당부에 그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몫이라고 한 것이다. 부족하더라도 그러한 고민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씩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시에 지켜보는 이들 역시 좀 더 경기를 즐길 수 있었으면 싶다. 특히 기대한 결과나 내용이 나오지 않았을 때 정도를 넘어서는 과도한 비난은 선수와 감독을 흔들고, 종국에는 보는 이마저 경기를 즐길 수 없게 만든다. 벤투 감독은 지난해 부임 첫 기자회견에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구를 보이도록 하겠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선수들에게 경기를 즐기라고 주문한 후 열린 두 번의 평가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모두가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김현길 스포츠레저부 차장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