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정오쯤 서울 종로구 농협 서울대연건캠퍼스지점에 20대 남성이 들어왔다.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이었다. 대학생인 이모(25)씨는 주택청약저축 약 500만원을 해지하고 현금으로 받아가겠다고 했다. 수년간 모은 것으로 보이는 돈이었다. 농협 직원 육정수(33) 과장이 이유를 묻자 그는 “등록금을 내려 한다”고 우물쭈물 답했다. 등록금을 현금으로 내는 게 이상하다고 여긴 육 과장이 질문을 이어가자 이씨는 “생활비로 쓰려한다”며 다른 말을 했다.
육 과장은 찝찝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혹시 검찰청 같은 데서 전화 왔어요?”라고 물었다. 이씨는 그제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이스피싱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육 과장은 수신호로 이씨와 대화한 뒤 곧바로 112에 신고했다. 도착한 경찰도 수신호나 수기로 이씨에게 지시하며 보이스피싱 수금책을 유인했다. 이씨는 주택청약을 해지한 척 연기하며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에서 수금책을 만났다. 잠복해 있던 경찰이 중국인 여성 A씨(28)를 붙잡았다.
이후 2차 수금책인 중국인 여성 B씨(31)도 함께 검거했다. 서울 혜화경찰서는 28일 사기 혐의로 A씨를 구속했다. B씨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이씨는 사건 당일 검찰청을 가장한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당신 명의로 대포통장 도용이 돼 빨리 잔액을 비우지 않으면 해가 갈 수 있다’는 전화를 받고 농협을 찾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은행직원도 믿을 사람이 못 되니 계속 통화상태를 유지하면 대처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말에 전화를 켠 채로 육 과장을 만났다.
혜화서는 이날 육 과장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그는 “피해자가 명문대생인데도 속을 정도로 보이스피싱범들이 용의주도한 것 같다”며 “취미가 복싱이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인데 일이 잘 해결돼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김원태 혜화서장은 “시민의 협조 없이 경찰의 힘만으로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며 “이 순간 시민이 경찰의 역할을 해주셨다”고 감사를 표했다.
권중혁 최지웅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