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서양의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던 14세기 초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살인범은 요르게라는 나이 많은 수도사였다. 그는 수십년 전 이 수도원의 거대한 서고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고, 그 책은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동료 수도사들이 우연히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되자 요르게는 그 책의 페이지마다 독을 바른다. 수도사들이 몰래 서고에 숨어들어 이 책을 읽을 때, 손에 침을 발라 책장을 하나씩 넘기는 동안 독이 그들의 혀를 통해 서서히 심장에 침투해 그들을 독살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요르게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책은 무엇이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1권은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제2권은 ‘코미디’를 다루고 있다. 코미디(comedy)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과장해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제2권에서 코미디의 웃음 효과가 교훈적 가치를 가지며, 따라서 비극과 마찬가지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요르게는 도저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진리란 오직 고행(苦行)과 수도(修道)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얼마나 진리에 이르기 위해 평생 동안 수도원에서 고행의 삶을 살았단 말인가! 그런데 한갓 천박한 시골내기들의 여흥과 같은 코미디가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그건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궤변’이 다른 사람도 아닌, 중세인들에게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인정 받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책은 더더욱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됐다. 요르게는 자신을 하나님의 정의로운 오른팔로 생각했다. 진리의 수호자로 확신했다. 그래서 자기의 권력이 닿을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즉 자신만이 알고 있는 거대한 서고의 밀실에서 동료 수도사들을 하나씩 독살했던 것이다.
범행의 전모는 윌리엄이라는 수도사에 의해 밝혀진다. 연쇄살인의 모든 것을 다 밝힌 후에 윌리엄 수도사는 진리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요르게를 향해 이렇게 소리친다. “요르게, 악마는 물질로 돼 있는 어떤 것이 아니야. 악마는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그리고 의혹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믿는 진리, 바로 그것이 악마야!”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다. 배가 고파서 그랬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다. 남의 밀 이삭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꽉 막힌 교조주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요르게처럼 자신들이 말하는 그 진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죄인’들로 정죄하고 또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꾸짖으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시하지 않는 어떤 율법이나 교리도 거부하셨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다. 세상의 아픔과 혼돈을 품게 하는 능력이다. 학문이든, 신앙생활이든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것이 자유로운 정신을 구속하고 내 얼굴에서 미소를 앗아간다면 그것은 참 진리가 아니다. 의혹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믿는 진리, 바로 그것을 경계하라.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미소로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진리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
장윤재(이화여대 교수·교목실장)